장미-1
올해로 할머니는 99세가 되셨다.
할머니에게 99라는 숫자는 오지 않았으면 하던 숫자였나 보다.
매일 아침 눈이 떠질 때마다 아직도 살아있음에 슬프다고 하신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하신다.
할머니의 사랑을 부모님의 사랑보다 먼저 알고 자랐던 나에게 할머니란 존재는 아직도 이 세상에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나를 안도하게 해주는 그런 의미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가끔 아니 자주 할머니를 생각한다
날씨 좋은 날 산책하다 벤치에 앉아 가만히 바람을 맞고 있던 날에도,
어느 날 특히 마음이 힘들었던 날에도,
누군가에게 눈치 없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에도,
일상 속 문득문득 할머니를 떠올린다.
며칠 전 동생에게 향기가 엄청 좋은 흰 장미의 이름이 뭔 줄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흰 장미는 대부분 향이 좋긴 한데 , 마르샤 장미인가 아님 마릴런 먼로 장미 일수도 있겠다."
라며 답장을 하는데 순간 할머니가 떠올랐다.
내가 흰 장미를 처음 본건 9살이었나 10살이었나 그때쯤이었다.
할머니 동네에는 매주 한 번씩 트럭에 이런저런 잡화나 소품 같은걸 싣고 오시는 아저씨가 계셨는데
하루는 할머니께서 흰 화기와 흰색 조화 장미를 몇 송이 사 가지고 오셨다. 할머니는 화기에 장미를 꽂으시며 "나보고 멋쟁이래, 다른 색도 아니고 흰 장미를 고르는 걸 보고 할머니가 진짜 멋쟁이시네요."라고 아저씨가 말씀하셨다고 싱글벙글 웃으시며 할아버지와 나에게 자랑하셨다.
흰 장미는 그 후로 오랫동안 뽀얀 먼지가 쌓이고 색이 바래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머니의 진열 장안에 고이 올려져 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흰 장미는 장미 중에서도 세련되고 멋진 꽃이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하고 있었나 보다. 지금도 누군가의 소중한 날을 위한 꽃을 제안할 때, 특히 부케 문의를 받으면 가장 클래식하며 시간이 지나도 세련되어 보이는 흰 장미 부케를 추천하곤 한다. 나 또한 결혼식 때 흰색 마르샤 장미 부케를 들었었다.
할머니는 흰 장미의 진짜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으셨던 걸까? 분명 향기를 알고 계셨을 것이다.
흰 장미의 향기를 맡아본다면 누구나 흰 장미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꽃 향기가 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가끔 손님이 꽃다발을 받자마자 기대감에 코끝을 갖다 대는데 그저 풀내음만 날 때가 있어 플로리스트 입장에서는 약간 민망할 때가 있다. 그래서 좀 더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한 선물일 경우에는 향이 깊은 장미를 넣는 편이다. 5월의 장미정원에 가보면 향기에 취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바로 느낄 수 있다. 도심 속 장미의 향연 속에서 그 향에 취하다 보면 평소 꽃에 감흥이 없던 사람들마저도 돌아오는 핸드폰 속에는 장미사진만 수십 장 찍혀있을 것이다.
그런 꽃의 여왕, 장미 중에서도 흰 장미의 향기는 유독 더 강하고 오래가는듯하다. 특히 시장에서 볼 수 있는 마르샤 장미와 마릴런 먼로 장미는 '아 장미 향수 향이 바로 이 향이구나' 할 만큼 진하고 로맨틱하다.
어쩌다 보니 한번도 할머니께 장미를 드려본 적 없던 나는 시장에서 흰 장미를 볼 때면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 한쪽이 무거워질 때가 종종 있다.
할머니가 더 이상 숫자 99를 싫어하지 않으실 수 있도록 할머니가 그때 좋아하시던 흰 장미로 99송이를 올해 생신 때 드려야겠다는 생각이든다. 내년에는 100송이로 드려야지.
비록 그 시절 그 장미는 향기가 없었지만 나의 기억에는 오랫동안 남아 흰 장미를 볼 때마다 나는 할머니를 떠올린다. 앞으로도 흰 장미는 나에게 언제까지나 나의 할머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