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가의 꽃 Jan 22. 2021

향기보다 짙은 프리지아의 기억

프리지아



 

보통의 평범한 우리가 꽃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을 때가 일 년에 몇 번 있을까.

특별한 기념일, 어버이날? 그것도 아마 꽃이 메인이 아닌, 선물을 돋보이게 할 정도의 부수적인 장치로써 꽃을 구입할 때가 대부분이지 않을까.

이 일년의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이벤트 같은 꽃 선물이 아무 날도 아닌  평범한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에게  불쑥 받게 된다면  어떠한 기분이 들까? 아마도 그날의 기억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찍혀  자신의 인생 챕터 속 행복한 한 장면으로 기록될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사진같이 선명히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2004년 22살,  인생 진로를 두고 방황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방황조차 순수하고 아름답다 여겨지지만 그때 그 시절의 나는 치열하게 고민했었고 불안한 미래의 무게로 힘들어했었다.  다시 오지 않을 반짝반짝 빛나던 22살의 그해 봄, 난 어둡고 답답한 학원 독서실에  앉아 자기 연민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왠지 처량한 기분과 누가 나에게 빚진 것도 없는데 괜히 억울한 심정에 내 청춘이 고작 이곳에 찌그러져 있다는 자괴감까지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내 표정이, 내 목소리가 주변에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점심 약속을 하고 학원 아래층으로 터덜터덜 내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꽃다발을  내 얼굴 앞에  불쑥  내미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나머지  짧게 소리 지르며 꽃다발에 가려진 얼굴을  바라보니  상기된 표정의 내 친구가 노란 프리지어 한 다발을 들고 그곳에 서있었다.

지금 다시 그 순간을 생각하면 괜히 코끝이랑 눈가가 빨개져 오지만 그때의 나는 친구랑 마주 보고 그저 깔깔 웃어대기만 했었다.  우리 둘은 별다른 말 없이,  친구도 왜 꽃을 나에게 주는지, 나도 갑자기 웬 꽃이냐고 묻지 않은 채  우리는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나도 그 친구도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노랑 프리지어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알고 있었다.  

 

친구는 그 후로 한참 뒤 내 결혼식에서도 꽃을 들고 눈시울을 붉힌 채  축가를 불러줬었고,  몇 년 뒤 내가 플로리스트가 되었을 때도 많은 응원을 해주었다.  지금은 각자 삶이 바빠  일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들지만 어느 날  별다른 이유 없이  내가 만든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찾아가 친구에게 불쑥 내밀어야겠다는 생각을 지금 이 글을 쓰며 한다.  

 특별한 날도 아닌, 어떠한 이유도 없이 받아 본  꽃은 22살 그 시절 그 친구가 전해준 노랑 프리지어가 처음이자 마지막인듯하다. 그래서  지금도 꽃시장에서 프리지어가 나오는 시기가 되면 난 22살의 그때로 돌아가 나를 바라보던 해사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살아가면서 나의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꽃이 함께했었다. 하지만  중요한 삶의 순간 속 화려한 꽃다발이 아닌 평범한 어느 날, 소박한 꽃 한 송이의 향기가 더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무를 때가 있다.  

아무런 이벤트도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지루하고 약간은 우울했던 내  청춘의 한 챕터 속,  한 다발의 노랑 프리지어 향기가 아직도 내 곁에 남아 그 시절의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






  




이전 02화 할머니와 흰 장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