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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감상법

by 염철현

이맘때가 되면 평소보다 창밖을 더 자주 보게 된다. 도보로 출퇴근하는 시간도 더 걸린다. 형형색색 물들인 단풍 때문이다. 아름다움에는 눈이 먼저 알아보고 걸음을 멈추게 한다. 단풍은 기온이 0℃ 부근으로 떨어지면 나무가 엽록소의 생산을 중지하고 잎 안에서 안토시아닌 등의 색소를 만들면서 나뭇잎이 붉은색, 갈색, 노란색 등으로 변하는 현상이다. 단풍은 엽록소 생산중지에 비롯된 자연현상이다.


사람마다 단풍을 감상하는 시선이 다르다. 특히 시인이 단풍을 읊는 언어는 제각각이다. 도종환은 '단풍 드는 날'에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라고 읊었다. 단풍을 버림과 내려놓음의 상징어로 표현했다(사람도 단풍의 내려놓음과 버림의 지혜를 닮는다면 마지막 순간을 아름다움으로 물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용혜원은 '가을 단풍'에서 "가을에/ 이토록 붉게 타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을 다 못 이룬 영혼의 색깔일까/ 누군가를 사랑하며/ 한순간이라도/ 이토록 붉게 붉게 타오를 수 있다면/ 후회 없는 사랑일 것이다"라고 읊었다. 붉은 단풍을 뜨겁게 타오른 사랑의 절규로 묘사했다. 나태주는 '단풍'에서 "숲 속이 다 환해졌다/ 죽어 가는 목숨들이/ 밝혀놓은 등불"이라고 읊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숲 속을 환하게 밝히는 등불로 표현했다. 한승수는 '단풍이 물드는 이유'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소멸의 순간 빛을 발하는가/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남들을 채워가야 한다"라고 읊으며 단풍이 드는 이유를 노래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낙엽이 꽃이라면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라고 했다. 단풍꽃의 탄생이다. 단풍 앞에서는 시인의 언어도 붉거나 노랗거나 주황의 형형색색이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단풍이 들고 지는 것 자체에 환호하고 시적 감성을 표현하고 있다면, 영국의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ë)는 '가을이여, 잎이여, 떨어져라'라는 시에서 능동적인 시적 언어를 구사한다. "떨어져라, 잎이여, 떨어져라/ 사라져라, 꽃들이여/ 밤은 길어지고 낮은 짧아져라/ 가을 나무에서 팔랑이며 떨어지는/ 모든 잎은 내게 행복을 말해 주네." 시인은 오로지 일인칭 관점에서 자신만의 욕구를 표현하고 있다. 자연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최대의 행복에 도달하려는 서양인의 의식구조를 반영한 시가 아닐까 싶다.


필자에게 단풍나무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목(裸木) 그 자체로 현재와 이별하고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이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떨어져나가야 하는 잎사귀와 나무가 겪어야 하는 이별의 슬픔을 인간의 감정으로 헤아리긴 어려울 것이다. 너무나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한 단장(斷腸)의 이별일 것이다. 그 이별을 슬퍼하는 눈물이 울긋불긋한 잎이다. 그래서 단풍을 보면 그것도 붉디붉은 단풍을 보면 피눈물을 상하게 된다. 그 붉은 잎에서 피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편하게 보기에는 은행나무잎처럼 노란 단풍이 안성맞춤이다.


형형색색의 단풍을 보면 인간군상의 얼굴과 매칭이 된다. 어떤 나무의 단풍은 색깔도 곱고 자태도 쭉쭉 뻗어 본래 잎사귀의 모습을 드러내는가 하면, 어떤 나무의 단풍은 잎사귀 반은 말라 쭈글쭈글하고 겨우 반만 단풍이 들어 있는 것도 있다. 단풍을 보면서 나의 얼굴 단풍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색깔도 아름답고 본래의 자태를 유지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은 40대 이후의 얼굴은 자기 책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세월을 견딜 삼라만상이 어디 있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단풍잎들이 떨어지면 빈가지만 앙상한 나무군상들만 남게 될 것이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는다. “나무가 매 마르고 낙엽이 지면 어디로 갑니까?” 스승은 “가을바람이 불어오매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는구나”라고 답한다. 저 유명한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다. 체로는 '몸이 드러난다'는 말이고, 금풍은 오행으로 '가을바람'을 뜻한다. 제자와 스승이 바라보는 단풍감상법이 이렇게 다르다. 제자의 눈에는 매 마른 낙엽이 보이고 그 낙엽을 연민하고 있지만, 스승은 겉데기를 벗은 나무의 진실을 보고 있다. 온갖 색상으로 치장한 깃털이 아니라 어떤 가식도 없는 몸통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은 가식과 허울로 몸을 칭칭 둘러맨 단풍을 보고 환호할 뿐 세상의 본질에 해당하는 앙상한 나무 가지는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필자는 그 찬란한 단풍이 낙엽이 되어 땅에 굴러다녀도 걱정하지 않는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는 말이 있다. 낙엽은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는 믿음 때문이다. 바람에 이리저리 치여도 낙엽이 된 단풍은 어느새 나무 주변을 감싸며 새봄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백꽃보다 더 붉은 단풍의 계절을 맘껏 보면서 그 추억을 담아두자. 혹시 낙엽이 되어버린 단풍을 빗자루로 쓸 일이 있으면 이렇게라도 예우해 주자.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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