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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욥 Jun 10. 2024

그 망할 은수저

기독교 대안학교를 가다

" 야! 스댕 숟가락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우리 집안을 무시해도 유분수라는 게 있는 거야!! "


 혼수랍시고 들어온 물건들 중에 그릇 세트와 수저세트가 있었다. 그런데 그 수저세트가 그냥 평범한 스테인리스 재질의 수저세트였던 것이다. 누구보다 전통을 중시하던 엄마는 그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의 주장은 이랬다.


‘우리 집안을 존중했으면 스테인리스 숟가락이 아니라 은수저 세트나 놋수저 세트가 왔어야 한다.'라고 말이다. 정말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까짓 숟가락 젓가락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하고 말이다.


“ 죄송해요. 엄마. 우리 엄마 성격이 좀 그렇잖아요. ”


 나는 제일 먼저 그녀의 엄마에게 가서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화가 난다고 막말을 퍼부어댔던 통에 그녀의 엄마는 쉽게 화가 풀릴 생각을 안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엄마도 내게 막말을 퍼부어댔다.


“ 쳇! 너네 집안이 뭐가 그리 잘났다고! 스댕 숟가락? 그거!! 일부러 그런 거야!! ”

“ 후... 알죠! 정말 죄송해요. 화 푸셔요...”


 나는 그녀와 깨지지 않도록 정말 많은 노력을 했지만 화가 나 있는 것은 그녀의 엄마뿐이 아니었다. 자기 엄마에게 막말을 퍼부어댄 것을 보고 그녀도 똑같이 화가 나버린 것이다.


“ 난 솔직히 이해를 하지 못하겠어.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엄마한테 왜 그러는 건데? 그건 오빠 엄마도 우리 집안 우습게 보는 거 아냐? ”

“ 하... 미안해. 응? 우리끼리는 그러지 말자...”


 내가 중간에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는 우리 엄마도, 그녀도, 그녀의 엄마도 그 누구의 화도 풀어줄 수 없었다. 결국 그 작은 불씨로 인해서 두 집안의 불화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고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갔던 우리 사이는 역시 깨져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그녀와 만난 지 1000일째 되는 날 말이다.


 나는 그녀와 공식적으로 헤어지고 나서 엄마를 찾아가 내가 갖고 있는 화를 있는 힘껏 내질러댔다.


" 앞으로 엄마 아들 장가가는 꼴 두 번 다시는 못 볼 줄 알아!! ”

" 뭐!!?? 이 새끼가!! 증말!! ”

" 이 정도로도 헤어졌는데, 앞으로 내가 어떻게 결혼해? 내 인생은 엄마 때문에 망쳐!! 알아!!?? ”


 나는 그녀와 헤어지고 엄마에게 막말을 내 퍼부어댔다. 내가 내뱉는 막말보다 내가 받은 상처가 더 크다고 생각을 했다. 정말 그랬다. 이 정도의 일로도 내 결혼이 깨져버렸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난 다음에도 엄마의 그 이상한 성격으로 인해서 내 가정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있는 막말 없는 막말을 마구 퍼부어댔다. 그렇게 한바탕 퍼부어 대어도 내 기분이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 


AI로 그린 상상 이미지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신혼집이라고 샀던 빌라에서 몇 날 며칠을 울어대며 씩씩거렸다. 그렇게 있으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놈의 빌라를 잘못 사서 그런 것인가? 그렇다고 이 집을 정리하고 엄마가 있는 중화동 집으로 들어가긴 절대로 싫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몇 날 며칠이나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차라리 술이라도 먹을 줄 알았으면 몇 날 며칠을 술로 지새웠을 것이다. 술도 먹지 못하고 그저 담배로 너구리를 잡으며 며칠을 보냈다.


 몇 년 전, 엄마와 새아버지는 경기도 연천에 5백 평 정도 되는 부지에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정원도 꾸며 놓고 주말이면 왔다 갔다 하는 세컨 하우스를 마련하셨다. 


 그곳은 엄마와 새아버지의 별장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나와 그녀가 시간만 나면 자주 가서 우리 둘만이 조용히 지낼 수 있는 아지트 이기도 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 한동안은 그 아지트로 가서 지내기도 했다. 시골이라 조용도 했거니와, 그곳은 그녀와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게 그곳은 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


"총각! 오늘은 혼자네? ”

"예? 아... 예... 그... 그냥요. ”


 우리나라 문화 중에 최고 싫어하는 문화. 오지랖. 내가 혼자이건 말건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알고 있다. 그건 오지랖이 아니라 한국사람끼리 아주 가볍게 주고받는 인사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밥 먹었어? ”

 라는 말이 정말 상대방이 굶었는지 궁금해서 묻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과


"뭐 해? ”

  라는 말은 상대방이 정말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묻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것쯤은 나를 비롯해서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일 것이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후로부터 내 성격이 이상해졌는지 몰라도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모두 짜증 났다. 또 한편으로는 그때 나는 엄마가 벌어주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무능력의 끝판왕이었으므로 이런 무능력한 나와 헤어진 것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더 잘 된 일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또 내가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니 내가 아는 무능력의 최종보스였던 나의 친아빠를 닮아가는 것 같아서 스스로가 짜증 나기도 했다.


‘ 넌 아빠처럼 살지 마라 '  하고 나만 보면 이렇게 말했던 아빠. 그때의 그 말이 내게 하는 저주가 되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실제로 난 정말 무능력한 내 아빠의 모습을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살지 마라 했는데, 점점 그렇게 살아지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내가 받은 상처는 몇 달이 지나도 가시질 않았다.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 내 컴퓨터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는데, 그 1만 장에 가까운 사진 자료들을 차마 나는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하면 금방이라도 자신도 보고 싶다고 오라고 그럴 것만 같고, 그녀도 나를 보고 싶어 할 것만 같았다. 사진 자료를 지우면 그런 작은 희망마저 없어질 것만 같아서 나는 도저히 그 삭제버튼을 누를 자신이 없었다.


 엄마는 내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엄마의 자존심이다. 분명 내가 아는 엄마는 엄마 자신도 지금 후회하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존심 때문에 자기 행동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 내가 엄마와 평생 등을 지고 엄마의 얼굴을 보지도 않으며 지낼 것이면 몰라도 그래도 내 부모이기 때문에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엄마는 내게서 더 이상 웃는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엄마 앞에서 즐거워서 웃는 모습을 결코 보여주기가 싫었다. 그저 무기력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전부였고 무언의 항의였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어 교원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고, 그녀와 헤어진 지 대략 1년이 훨씬 넘게 흐른 2015년 말~2016년 초쯤이었다.


 엄마는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내가 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나 역시 더 이상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고 해도 더 이상 엄마에게만 의존하는 것 자체가 싫기도 했거니와 엄마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별로 없었다. 교원자격증을 가지고 수많은 학교에 기간제 교사라도 하고 싶어서 이력서를 넣어 봤지만, 경력이라고는 학원강사밖에 하지 못했던 나를 쉽게 받아주는 학교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아니면 임용고시라도 볼까? 하는 생각은, 교육대학원도 겨우겨우 졸업한 멍청한 내게는 임용고시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도 같이 느껴졌다. 당시에는 노량진에 임용고시 학원들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상태여서 그저 혼자 공부해서 합격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고, 나는 내 능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병신이었다.


 그때는 왜 다른 곳에는 눈을 돌리지 못했는지, 지금에 와서는 ‘난 정말 정말로 멍청한 인간이었구나.’라는 자학을 끊임없이 하는 그런 찌질한 인간으로 변해버렸다.


 아무튼 그땐 나도 그렇지만 엄마도 날 교사로 만들고 싶어서 나보다 더 안달이 났다. 심지어 엄마는 돈을 주고라도 사립학교 교사로 만들고 싶어 했다. 엄마는 자신의 모든 인맥을 활용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정말 엄마에게 더 이상 손을 벌리거나 기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렇게 뇌물을... 아니 발전기금을 주고서라도 방법과 연줄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알아낸 곳이 바로 경기도에 있는 한 기독교 대안학교라는 곳을 알게 되었다. 사립학교 정식 교사 자리도 아니지만 일단은 여기에서 경험을 쌓고 있으면 어떻게든 알아봐서 사립학교 정식 교사로 넣어준다는 것이다.


 대안 학교가 뭔 지도 몰랐고, 게다가 기독교 단체가 운영하는 학교라니 찝찝했지만, 그때 내 목표는 어떻게 해서든지 엄마로부터 경제적 자립을 하는 것이 가장 시급했으므로 이력서와 자소서를 쓰고 그 대안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리고 면접 당일이 되었다.


" 합격시켜주면 교회 다닐 거예요? ”


 그 대안학교 면접 자리에서 여자 교장선생님이 내게 묻는 말이었다. 나는 합격시켜 준다는 말에 덜커덕 교회를 다니겠다고 해버렸다. 


 나는 평생 내 엄마의 직업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고, 내 엄마는‘무당'이라고 자랑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면접자리에서 만큼은 우리 엄마는 평생 교회를 다녔던 절대적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는 교회를 다녔지만, 아들은 교회와 믿음에 관심이 없어서 다니지 않았던 그런 스토리가 저절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나는 무당 아들이면서 직장은 기독교 대안학교를 다니는 국어교사가 되어버렸다. 내가 맡은 반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는데, 처음부터 담임 직책을 맡게 되었고 그 학교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국어 전담 교사가 되었다.


 아무리 내가 엄마에게 화가 나서 있는 상태였다고 치더라도 내게 걱정되는 것이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늘 혼자 있게 된 엄마에 대한 걱정이었다. 


 " 이렇게 하면 내 핸드폰으로 집을 볼 수가 있는 거야 ”


 엄마 옆에 새아버지가 계시다고 하더라도 매일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집에서 왔다 갔다 하며 지내는 사이라서 엄마는 늘 혼자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 끝에 엄마의 신당에 CCTV를 설치하고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시청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하면 귀중품이나 현금이 많은 신당이라도 어느 정도는 보안적인 면에서 커버가 되고, 또 실시간으로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이 되니까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나는 CCTV를 설치하고 나서야 중화동에서 학교 근처 오피스텔로 독립하게 되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 7시 50분까지 출근해서 오후 6시까지 근무를 하고 또 일요일이면 학교 내 교회에 가서 주말 예배를 봐야 했다. 게다가 한 달에 1회씩 학부모들을 학교로 호출해서 학교에서 '페어런츠  데이'를 개최한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받는 내 월급은 무려 1백2십7만 원. 학교 근처 오피스텔 월세 50만 원을 내고 관리비 15만 원에 전기료, 통신비 등 이것저것을 빼고 나고 나서도 무려 마이너스가 되어버리는 신비한 월급이었다.


" 월급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경험 쌓는다 생각하고 다녀~ 월급은 중요하지 않아. ”


 엄마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 역시 그저 경험을 쌓자 라는 심정으로 월급을 신경 쓰지 않고 다녔다. 그것이 내게 독이 되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


 아무리 내가 멍청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런 교육자 입장에서는 그 대안학교의 교육방침이 정말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 학교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기준으로 보면, 최초 입학금은 5백만 원, 그리고 한 달에 드는 교육비만 70만 원을 내고 다녀야 한다. 여기에 차량운영비, 식비, 등등 모든 비용은 따로 받는다. 누가 그런 많은 돈을 내면서 초등학교 1학년부터 보내는 사람이 있나? 하겠지만 그건 나만의 큰 착각이었다. 이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들은 일반 교육과정보다 성경의 말씀과 예수님을 배워나가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들이었다. 


 그렇게 출근한 첫날, 오전 7시 30분에 출근을 하고 정확히 7시 50분이 되면 교사들끼리 모여서 아침에 성경을 읽고 QT라는 걸 시작한다. QT는 날마다 정해진 성경 구절을 읽고 서로 그 성경 말씀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감상을 나누는 일이었다. 처음엔 그 성경을 읽고 국어교육과 출신인 나도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저 얼버무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 후 이어지는 내게는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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