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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수야 Sep 29. 2020

할머니 자서전

할머니도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겠지#2

어버이 날 나는 부모님보다 할머니께 어떤 선물을 드려야 할지 고민했다.


하루 4시간 주 이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나에게 주어진 돈은 한정적이었고 그런 주제에 무언가 특별한 선물을 해드리고 싶었다.


한번 먹거나 몇 번 사용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남아있을 수 있는 무언가 그러면서 너무 비싸지는 않은 그런 특별한 선물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게 이 세상에 있기는 할까)


며칠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문득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티브이에 볼 것이 하나도 없다며 투덜거리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그래!! 이거다!!'

나의 머릿속에는 요즘 유행하는 자문자답 형식의 자서전  생각이 났다.


실제로 주변 지인들도 평소 생각해 보기 어려운 질문에 답하려 하니 시간도 잘 가고 자신의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어서 참 좋았다는 몇몇 후기들이 들려왔고


유레카!!

나는 바로 책을 주문했다.


꽃을 좋아하시는 할머니기에 포장도 돈을 추가해 꽃 프린팅이 되어있는 두꺼운 박스 포장으로 선택했다.

두근 거리는 묘한 설렘으로 배송을 기다리며

같은 날에 쇼핑몰에서 시킨 하늘색의 원피스보다 책의 배송을 더 기다렸다.


다음날 책은 배송이 되어 왔고 나는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이렇게 특별한 선물을 드리는 손녀는 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고작 2만 원도 안 되는 선물에 기고만장한 마을로 두꺼운 꽆 프린팅 박스에 포장된 책을 자신 만만하게 할머니께 건넸다.


"이게 뭐니? 아이고.. 할머니 선물 산거야?? 돈도 없으면서.."

단단하게 포장되어 있는 박스를 신기한 듯 살펴보는 할머니의 눈길에는 책망하는 말투 사이로 은은하게 느껴지는 고마움과 기대감이 느껴졌다.


서툴게 포장을 뜯는 할머니의 느릿한 손길을 못 참고

그렇게 뜯는 게 아니라며 직접 포장을 뜯고 책 한 권 보다 더욱 가득 들어있는 뽁뽁이들을 헤치며 책을 꺼내 들었다.


"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건넨 자서전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시던 할머니는 열렬이 이 책의 용도에 대해 설명하는 나의 상기된 목소리를 들으시며 책을 펼쳐보시던 할머니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야야~ 뭘 적으라고 이런 걸 사 왔어! 할머니는 이런 거 못 적어!"

"할머니 그냥 질문에 답만 적으면 되는 건데?? 어려운 거 아니야!! 이런 거 생각하면서 적으면 할머니 옛날 생각도 나면서 재밌지!"


질문을 하나하나 천천히 읽어보는 할머니의 눈가에는 어느새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어.. 이건 내 예상과는 다른 전개다..


"할머니는 살아온 인생을 다 적으라고 하면 너무 기구하고 슬퍼서 못 적어. 그걸 어떻게 여기에 구구절절 다 적겠니.."

어.. 이건 내 예상과는 매우 아주 다른 전개다..


천천히 책을 넘겨보더니 이윽고 책을 덮고는 조용히 거실로 나가시며 티브이를 보는 할머니의 뒷모습에 나는 무엇인가 큰 잘못을 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절대 열지 말아야 할 것을 열어보라고 천진하게 등을 떠민 것 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친했던 동네 친구가 누구인지, 할아버지와는 언제 만나서 어떤 추억을 쌓았는지

나에게는 너무도 간단하게만 느껴졌던 질문들이지만


아.. 할머니에게는 작은 종이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운 무거움일지도 모르겠구나

저런 질문 하나하나가 할머니 에게는 어쩌면 추억이 아닌 견뎌야 했던 세월의 흔적일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더 이상 할머니에게 자서전을 써보시라고 이야기하지 못 해다.


잠깐의 지나간 세월의 한 부분을 엿보는 데에도

쓸쓸함이 묻어났던 할머니의 얼굴이 생각이나 할머니의 방구석  작은, 10년도 더 된 라디오 위에

빳빳한 그대로 놓여 있는 그 책을 차마 다시 펼쳐 적어보라고

권 할 자신이 없었다.


할머니의 세월은 얼마나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서글프고 서글픈 것이어서

사람들의 흥겨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티브이를 보면서도


다시 태어나면 바람으로 물로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읇조리시는 것인지

나는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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