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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수야 Sep 30. 2020

12,000원

할머니도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겠지#3

추석 때 제사에 올릴 음식을 해야 한다며 할머니는 요 며칠 계속 시장을 왔다 갔다 하셨다.

다리도 안 좋으 시면서 그냥 가까운 마트에 가시면 될 텐데

식구들이 먹을 음식이라며

손녀들과 딸에게 유난이라는 말을 들으시면서도

평소 작은 두부 한 모라도 꼭 시장에서 직접 사시는 할머니가

이런 명절 날을 그냥 넘어가실 리가 없었다.


오늘도 아침을 드신 후 시장을 갔다 오겠다며

천천히 뭘 사야 하는지 거실 한 편에 앉아 생각하시던 할머니는

문득 어제 시장에 갔다 돌아오며 발견한 화분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나이가 들면서 통 먹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없다며 이야기하시던 할머니는 예쁜 화분을 보면 그 화분이 그렇게 계속 생각이 난다고 하시며 입에 함박웃음을 지으신 채로 12,000원짜리 화분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사고 싶었는데 짐이 너무 많았어서

그리고 12,000원이나 하는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화분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이야기하시며

내 눈에도 예쁜 화분이니 분명 누가 사갔을 것이라

짐짓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방 문 너머에서 머리를 만지던 언니의 귀에 끼지도 들어갔다.


언니는 방문을 열며 평소에는 절대 열지 않는 지갑을 열며 하늘빛 나는

카드를 할머니에게 건넸다.


그렇게까지 기억에 남는다면 오늘 시장 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사 오라며

집에서는 마실 것 하나 자기 돈으로 사는 일 없는 언니가 그럴 정도이니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가득함이 느껴졌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나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 화분의 이파리가 어땠는지

자라면 얼마나 고고한 모습으로 할머니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지


고작 12,000원 밖에 하지 않는 화분에 대해

마치 눈앞에서 생생하게 자라나고 있는 것 마냥 이야기를 그려냈으면서


결국 할머니는 언니가 건네는 카드를 한사코 받지 않았다.


"어차피 팔렸을 거야

다음에 다음에.. 더 예쁜 화분이 있겠지 그때 사면돼"

 

나는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말했던 무수한 다음들은

항상 거기서 끝이었다는 것을


내가 지금 카페에서 글을 쓰며 먹는 아메리카노와

손바닥만 한 치즈케이크를 합한 금액이 보다도 적은

12,000원이


할머니에게는 무수히 많은 다음 중 하나라는 것이 어쩐지

오늘따라 아메리카노가 더욱이 입안 가득 쓴 맛을 남기는 이유가,

그렇게 자주 먹던 치즈케이크가 목에 턱 하고 걸리는 이유인 것만 같아


문을 나서기 전 슬며시 현관 앞에 현금으로 두고 나올걸 그랬다.

다음에 다음에.. 오늘 집에 돌아가면 할머니께 들려야겠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무수한 다음들은

항상 너무도 쉽게 흐릿해지고 익숙해져 버린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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