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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수야 Oct 03. 2020

익숙함

할머니도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겠지#4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나에게 할머니는 가장 소중한 존재임과 동시에 가장 익숙한 존재이다.


원래는 너희 언니가 태어났을 때 정말 잠깐, 잠깐만 봐주려고 했는데

엄마라는 역할이 서툴었던 나의 딸이

내가 엄마인 줄 알고 계속 나를 찾는 너와 너네 언니가 계속 눈에 밟혀서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라는 말보다 할머니라는 말을 먼저 옹알댔고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올 때도 배가 고플 때도 아플 때도

엄마보다는 할머니를 찾는 것이 당연했다.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 속 가장 많은 순간들에 할머니가 있었고

내가 살아왔던 시간들 속 그 어디에도 할머니가 없는 순간들은 없었다.


나에게 너무도 익숙한 그 존재가

어떤 순간에는 너무도 소중했지만


집에 늦게 들어올 때면 울리는 전화벨 너머로 들려오는 한숨 섞인 목소리가

집에 식구 중 한 명이라도 들어오지 않는다면 꺼지지 않는 희미한 거실의 불이

어떤 순간에는 너무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더욱 흐를수록

할머니가 살아왔던 시간과 내가 살아가는 시간 속의 간극이

너무도 크다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그 간격들은 뒤틀림을 만들어 서로 맞물리고 이윽고는 큰 굉음 같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소리를 질렀고 진절머리를 쳤고

짜증을 내며 이해하지 못했다.


나에게 너무도 익숙한 존재였던 할머니는

나에게 너무도 당연한 존재가 되어 버렸고


그 속에서 소중함이란 더욱더 희미해져 갔다.


그런 익숙하고도 당연한 하루들 속에서

특별할 것도 없는 하루가 있었다.


그 날은 유독 카페에 사람이 많은 날이었다.

같은 시간대의 마감 아르바이트생이 건강상의 이유로 출근하지 못했고

밀려드는 손님들과 부쩍 차가워진 겨울바람은

틀 때마다 먼지 가득한 냄새를 풍기는 미약한 히터 바람으로는 가시지 않았고

그 탓인지 아침부터 이어진 감기 기운은 계속해서 목을 긁어댔다.

모든 것이 다 맞춰진 것 마냥 엉망 그 자체인 날


머리털 끝에까지 느껴질 정도로 나는 예민해 있었고

어김없이 희미하게 켜져 있는 거실 불을 보며 한숨을 쉬고 집으로 들어가던 그런 날이었다.

거실 한 편에서 의미 없이 켜져 있는 티브이 소리를 들으며

쭈그리듯 벽에 기대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왜 이렇게 늦었냐며 밥은 먹었냐는 그 소리가

그 날따라 왜 그렇게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짜증 내듯 발을 구르며 알아서 하겠다고 팩 쏘아붙이고 방으로 들어가던

그런 날이었다.


날이 선 발걸음이 집 안 가득 울렸겠지

그 발걸음이 혹여라도 할머니의 마음까지 울렸을까

방 한복판에 늦을까 봐 미쳐 치우고 나오지 못한 옷가지들 대신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방 위로 보기만 해도 폭신하고 아늑한 이불이 깔려 있었다.


"오늘 아침에 기침하더라.

방 따뜻하게 데워놓고 이불 깔아 놨으니깐 오늘은 씻고 빨리 자라."


어느새 거실에서 일어나 식탁을 지나 부엌으로 향하며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손에는

철없는 손녀가 출근을 하며 투정 부리듯 먹고 싶다며 이야기한 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가 들려져 있었다.


"오늘 아침에 먹고 싶다며, 혹시라도 저녁 안 먹었으면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아..

순간 방바닥의 따뜻한 기운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며

감기 때문인지 시큼해지는 목으로

추운 바람을 맞고 들어와서인지 발갛게 붉어지는 눈시울로 전해졌다.


현관을 지나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오던

나의 날이 선 발걸음이 집 안 가득 울렸겠지..

그 발걸음이 혹여라도 할머니의 마음까지 울렸을까


후회 섞인 생각들에 시린 듯 아려오는 마음과는 다르게

꽁꽁 얼어버린 몸 구석구석 전해지는 익숙한 따뜻함이 너무도 포근해서

그 날 나는 방문을 닫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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