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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Jan 03. 2022

내 생에 가장 빛났던 순간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금년에 무사하게 가을을 맞을 것 같다는 기대를 저버리고 가을장마는 막 여물어가려는 황금 들녘을 휩쓸어 농부의 이마에 깊은 골을 만든다.

폭우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예 양동이로 쏟아붓는 형국이니, 무엇이 남아날까? 하늘이 심술을 부려도 이건 너무한다 싶었는데 이번엔 또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몸을 으슬으슬하게 하더니 마침내 감기란 놈이 몸살을 대동하고 내 머리를 강타한다. 모처럼 전국 학예 경연대회에 참가해야 하겠는데, 아예 출전을 포기해야 할 판이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학교 홈페이지에 참가가 불투명하다는 SOS를 긴급 타전해야 했다.

어젯밤, 내 무전을 수신한 1학년장과 동갑내기 선배 2학년장이 긴급회동하여 논의한 결과 황송하게도 나를 수송하겠단다. 이쯤 되면 감기가 아니라 죽을병이 걸렸다 해도 결시할 수는 없었다. 빗속을 뚫고 고속도로를 달려 우리 학교 일행과 합류했다.


하늘은 잠시 소강상태로 빗발이 가늘어졌을 때 목적지인 청소년 수련원의 정문에 다다르니 아치형 조형물이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청소년이란 단어가 생소하면서 민망하고 쑥스러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본다. 순간 검은 먹구름 사이로 동전만큼 푸른 하늘이 보이고, 그 좁은 틈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내려 비추며 "이 사람! 자넨 지금 열일곱이야." 그렇게 한줄기 빛을 타고 어머니의 음성이 묻어 들리는 것 같다.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숱한 좌절과 절망을 어금니로 씹으며 오직 생존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옆을 볼 여유 없이 살아온 내 삶의 60년... 그 60년을 이 청소년 수련원을 들어서면서 다시 돌아본다.

어느 곳엔가 내게도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 있었을 것인데, 내가 맺은 그 많은 인연 중에 분명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도 있었을 터인데... 그래, 그것들을, 그리고 그 사람을 찾아서 다시 돌아가자. 열일곱 소년으로 다시 돌아가자. 이제부터 내 삶을 역주행하며 길 숲 어딘가에 두고 온 빛나던 순간을 찾고, 고갯마루 늙은 소나무 아래 남겨둔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사람도 찾아, 떠나온 슬픈 사연들을 말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내가 월남전이라는 그 이상한 전장에서 삶과 죽음의 전투를 하던 1967년~1968년, 내 어머니의 단 하나의 소원은 오직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무사하게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일 년 삼백예순다섯 날을 장독대에 정화수 떠놓고 이 아들의 무운을 빌었단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일은 어머니의 하루였고 어머니의 전부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어머니의 정성을 가슴에 담고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사람이 살면서, 아니 적어도 나는 가장 아름다운 한 사람을 말하라고 하면 감히 누구 하나 뽑아 말할 수 없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어머니의 사랑 등등 나열할 수조차 없다. 생각하면 그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살아온 세월이라면 내 삶이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니, 서러워하지 않으련다. 그런 것들이 나를 여기로 안내했으니, 아마 내 생에 가장 빛났던 순간보다 더욱 빛날 순간은 다시 올 것이다. 따라서 가장 아름다운 한 사람을 택하지 못함은 내 필력이 부족함이며, 가장 빛났던 순간은 앞으로 있을 날을 위해 아껴둘 것이다. 욕심과 마음을 비웠으니 이젠 미련도 소원도 다른 이에게 양보하며 살고 싶다.

그런데 참으로 생각지도 않게 전국 학예 경연대회 문예부문에서 금상을 받는 영광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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