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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Jan 11. 2022

호수의 눈물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아침 아홉 시를 조금 넘어서 정문을 벗어난 버스는 우중충한 회색 빌딩의 숲을 벗어나 거침없이 북쪽으로 주행했다. 쌀쌀한 날씨지만 선배들의 뜨거운 열정은 꽃샘추위조차 막을 수 없었다.

선배들의 환대는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 가물거리는, 그 어린 시절 소풍 가던 날 분위기 같아, 조금은 쑥스럽고 어색한 나이 든 신입생들의 닫힌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고 있었다. 내가 소속된 문학 동아리에서 신입생 환영을 위한 봄나들이 삼아 명성산 기슭에 있는 산정호수로 향하고 있었다.


시대를 종횡무진하며 살았던 풍운아 궁예와 통한의 눈물로 함께 울어 산천을 통곡케 한 명마의 전설인가? 마의 태자의 애끓는 망국의 서러움이 알알이 맺혀 울음 산이라 했던가? 천년의 세월을 타임머신으로 훌쩍 날아온 할 일 없는 나그네는 알 길이 없다. 산의 눈물일까? 마(馬)의 눈물일까? 그도 아니면 자연의 눈물인지도 모를 수정 같은 눈물이 방울져 모아진 산정호수의 쪽빛 같은 맑은 물 위엔, 명성산과 더불어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호수를 품고 관음산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고 있었다.

억새풀이 지천으로 자생해서 장관을 이룬다는 산정호수에도 뒤늦은 봄기운이 완연하다. 천년의 역사가 말없이 잠들어 있는 호숫가엔 봄 맞이 원색의 인파가 모처럼의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다.


이미 그곳엔 선발대로 도착하여 기다리던 선배들이 이제 막 도착한 우리를 또 환영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우린 영락없는 일학년 신입생이다.

버스에서 짐을 나르기에 여념이 없는 선배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요즘처럼 삭막한 세상에 이처럼 알뜰하게 후배들을 챙기는 선배들이 있을까? 열일곱으로 되돌아가기로 작심하고 늦은 공부를 하겠다고 입학은 했으나, 아직은 확신과 불안이 갈등하고 있는데 나보다 한참이나 젊어 뵈는 선배들의 마음 씀씀이가 눈물겹도록 고맙다.

이 시대에 잘못 태어났음을 스스로 한탄하던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가슴앓이를 해온 우리들은 서로 나누지 못할 사연들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그런 아픔을 달래주려고 모처럼의 휴일을 흔쾌하게 반납하고 함께 해준 선생님들도 새삼 존경스러워진다.

알 수 없는 분노로 좀처럼 존경할 스승이 없음을 한탄했었다. 어쩌면 이런 선배들과 선생님들이 함께 가는 길이라면 내 서러움의 세월을 씻을 수도 있으리라는 확신에, 얼어붙은 불신의 마음을 열어간다.

자리에 펼쳐진 진수성찬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려 문득 한솥밥의 의미를 되새긴다. 어머니의 손길이, 내 누이의 손맛이 묻어나는 이것이 한솥밥이 아니고 무엇이랴.

나와 나란히 앉아 부지런히 수저를 놀리는 그는 내 형이요 아우일 터이다. 한솥밥을 나누어 먹는 우린, 그 순간 한 식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누어 주고 싶고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속에서 천천히 하나 되어 감을 느낀다.


갈증이 온다. 무엇인가 애타게 찾아오는 목마름이 아닌 정(情)과 사랑의 갈증이...

알고 싶고 배우고 싶어 내 반생을 지배해온 알 수 없던 그 갈증이, 이 들과 함께라면 말끔하게 씻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마땅히 쓰디써야 할 소주가 감로수처럼 달콤하다. 입안에 자꾸 붓는다. 취하고 싶었다.

오늘은 내 짧은 글재주로는 감히 표현할 길이 없는 감동의 순간을, 취선(醉仙)이 되어 흉내 내고 싶어 진다. 그러나 아직은 내게 능력이 없음을 한탄하며 백일장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 호수에 어린 명성산 그림자에서 궁예의 말과, 마의 태자의 눈물을 찾는다.

그 소중한 시간의 아쉬움을 끝내 감추지 못하고, 여운을 간직하고 싶어 스스로 대취하려 한다. 일찍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 정겨운 선배들과 학우들 틈에서 끝까지 함께 자리하며, 아직도 내게 열정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며 돌아왔다. 참으로 소중한 하루를 만들어 준 선배님들께 이 글로 고마움이 전해 졌으면 하는 소망을 조심스럽게 더하며, 재주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시선(詩仙) 태백을 훔쳐본다.



울음 산(鳴聲山) 자락 호숫가에

쪼그리고 앉아 쪽빛 호수를 듣는다.

작은 귀로 들을 수 없어 가슴을 열었다.

바닥에 길게 누운 산자락이 기지개를 켜고

심연에 잠든 천년의 명마가 용울음을 운다.

말이 운다. 산이 통곡한다.

안미륵(獨眼彌勒) 사무친 한의 눈물이

산상에 웃물 되어 주인 잃은 충의 마(馬)

목마름을 달래고, 이름 잃은 나그네

일러 부르길 울음 산(鳴聲山)이라 했던가?


명성산(鳴聲山) 자락 호숫가에서

천년사직 무너지는 하늘 소리 듣는다.

귀 막고 마의(麻衣) 수의(壽衣) 걸친 귀인을 본다.

불타는 서라벌 천만번 돌아보며

통한(痛恨)의 혈루(血淚) 점점이 뿌렸어라.

태자 관(太子 冠) 벗어 사직에 고하고

풍운 따라 흐르는 천년 나그네 되니

머물다 떠난 자리에 무심한 억새만 운다.

마의태자 한 조각 진홍(眞紅)의 충혼(忠魂)이

백이숙제(伯夷叔齊) 울려 명성산(鳴聲山)이라 했던가?


<명성산(鳴聲山) 자락에서 2010. 0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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