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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Jan 09. 2022

밤색 가방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내가 가지고 다니는 가방은 흔히 말하는 국방색에 원단도 투박하고 거칠다.

크기는 남들이 들고 다니는 보통의 크기인데 공간이 효율적이지 못한 건지, 내가 담는 요령이 잘못된 건지, 사이버 학습지 한 권, 일용할 양식 도시락 한 개와 얼음을 담은 보온병, 그리고 약간 잡다한 것을 담으면 산월이 가까운 임산부처럼 배불뚝이가 되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제 몸속에 들어있는 물건에 비하여 무겁기까지 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새로 가방을 사자니 공연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집에 안 쓰는 가방이 널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 구입하는 걸 미뤄왔는데 얼마 전부터 마음에 드는 가방이 눈에 띈다. 아들이 가지고 다니던 가방이다. 지금 저 가방을 쓰는 거냐고 조심히 물었더니 가끔 쓴다고 한다.

못 들은 척하고 그 가방에 주섬주섬 책을 집어넣고, 체육과목이 있으니 운동화도 챙기고, 미술 준비물도 옆 공간에 넣었다. 제법 묵직하지만 아직도 여유가 있는 밤색 가방이 마음에 꼭 드는데 문제는 집사람이다. 아이의 가방을 왜 빼앗느냐고 난리를 친다. 실은 오늘 하루만 빌려 쓰고 돌려줄 요량이었는데 아내가 난리를 치니 슬그머니 오기가 생긴다.

"아니! 나는 평생 제 놈 가방을 사줬는데 저 가방 아비가 하나 쓴다고 뭐가 그렇게 대수야?" 고함을 치고 예의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거칠고 투박하던 종전의 내 가방과 달리 비단처럼 부드러운 감촉 하며, 넉넉한 수납공간이 마음에 들어 다시 돌려주고 싶지가 않다.


예전에 가방은 여성들의 전유물로 핸드백이라고 불리며 멋쟁이 여성들에게 사랑받는 액세서리로 패션의 일부가 되어 오랫동안 그녀들의 필수품이 되어왔다.

BC9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는 걸 보면 그 역사가 무척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 경기의 대한민국 첫승 제물이 된 그리스의 고대사회에서 포켓 대신 이용한 것이 그 시초라는 설도 있어, 정확한 연대를 측정하기보다는 그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오면서 여성들에게 사랑받았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요즘은 남성들도 겨울철에는 의상에 포켓이 많아 가방이 쓰임새가 적었으나, 여름철에는 소지품의 휴대 공간이 마땅치 않아 즐겨 쓰고 있는데, 아침 출근길에 보면 모두 가방을 들고 다니니 현대인의 필수품이라고 해도 될 성싶다. 가방 하나쯤 들고 다녀야 백수 티를 안 내고 직장에 출근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이 가방이 실용성보다는 자기 과시를 위한 부의 척도로 쓰이며 여성 심리를 자극하여 나 같은 서민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소위 명품가방이라 하며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고 하니, 그러한 명품백은 도대체 무엇이 그리 다른지 궁금하기도 하다.

사실 궁금하기로는 그 가방에 들어 있을 내용물이 더 궁금하지만, 지나가는 여자의 가방을 다짜고짜 좀 열어 보자고 했다간 뺨이 성하지 못할 테니 그냥 참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아내나 딸의 가방을 뒤집어 보면 알 수도 있으련만 그랬다가는 늙은이 주책이라고 할 터, 그냥 궁금한 대로 참는 게 신상에 좋을 것 같다.


지금은 학생들이 양손을 편하게 쓸 수 있도록 실용성 있는 '백팩(?)'이라고 하여 어깨에 멜빵을 지어 메고 다니지만 내가 어렸던 시절 추억의 책가방은 손잡이에 두줄로 난 끈으로 들고 다녔다.

반듯하게 끈을 들고 다니는 학생은 모범생으로 보아도 되지만, 책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교모는 약간 비뚤어지게 쓰고 교복의 호크를 풀어헤쳤으면 이건 영락없이 소위 말하는 지금의 '일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도 그 시절의 그 책가방을 옆에 끼고 교모도 좀 삐딱하게 쓰고 교복 위의 단추를 풀어헤친 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이며 만두를 팔던 시장통 입구의 풍미당을 기웃거리면서 사뭇 잘 나가는 척 폼을 잡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지금은 그 빵집 대신 방과 후 끼리끼리 만학의 老학생들이 소주 집을 기웃거리는 건 아마도 그 정겹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나씩 둘씩 옛 추억의 조각난 편린을 찾아 퍼즐을 맞추듯 그 옛날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렇게 잃어버린 학창 시절을 찾아가노라면 못 다한 공부의 미련과 그 시절의 낭만을 다시 기억해내서 꿈, 그리고 우정이 샘솟던 동아리 활동에도 관심을 갖게 되겠지 싶다.

보다 더 적극적으로 수줍음과 소심함 때문에 수없이 망설이던, 그러나 꼭 해보고 싶던 일들을 하고 싶어질 것임을 느낀다.


아들 소유의 밤색 부드러운 가방을 이젠 내 소유로 소유권 이전을 시켜버렸다.

앞으로 나와 3년을 함께 내 추억을 찾아줄 이 가방이, 새로 산 그것보다 더 정답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내 아들의 손때가 묻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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