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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Jan 13. 2022

운명의 역린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역린(逆鱗)이라는 말은 중국 전국시대의 법치주의를 주창한 한비와 그 일파의 논저인 한비자의 세난 편에 나오는 말로, 용이라는 신성하고 영험한 상상의 동물은, 거스르지 않고 잘 길들이면 사람을 태울 수 있을 만큼 인간에게 이로운 영물이나, 목 아래 직경 한 자쯤 되는 위치에 거꾸로 달린 비늘, 즉 역린을 건드리면 사람을 죽인다 했다.

임금에게도 용과 같은 역린이 있어 수많은 충신들이 충언과 직언으로 임금의 역린을 건드려 그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죽어 갔다고 해서 사람은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말할 때 곧잘 인용하곤 한다. 지금 난 내 운명의 역린을 건드리고 어쩌면 하늘의 순리 조차 거부한 채 내 삶을 근본부터 거꾸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하늘의 노여움은 훗날의 이야기이고, 당장 세속의 많은 지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릇 인간의 보편적인 순리는 부모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 속에 세상에 그 첫울음을 울고는 부모님의 크신 사랑의 보살핌으로 학교를 다니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삶의 계단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차근차근 밟아 세상에 필요한 재목으로 한 나라의 동량이 되기도 하는 것이 순리라는 것쯤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한 복을 타고난 별천지 사람들의 보통의 이야기일 뿐, 몰락한 양반가의 후손으로 송곳조차 꼽을 땅 한평 없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어, 그저 세상에서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60여 년을 잘도 버티고 살아왔다.

물론 예외도 있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기연을 얻었거나, 일찍 뜻을 정하고 주경야독으로 고학이라는 험산 준령을 넘어 나라와 인류를 위해 크게 이로움을 준, 소위 출세한 사람도 있기는 하다. 

흔히 입지적 인물로 장안에 회자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그도 못하고 오직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본능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스스로 만족하고 자신을 대견해한다고 해서 아무도 나무라거나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속이고 회한 속에서 나 죽는 날 염라대왕에게 당당하게 내놓을 이승에서의 내 기록표에 천형처럼 기록되어 온 이력을 바꾸지 않고 차마 떠날 수 없다는 남모르는 아픔이, 나로 하여금 운명을 거꾸로 돌려 겁 없이 내게 남은 자투리 삶을 더 이상의 후회로 남기지 않으려는 마음에 용의 역린을 때리고 말았다. 


돌아보면 또래의 친구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학원에서 땀 흘릴 때, 내가 가는 길엔 장미꽃 대신 메마른 가시밭길이 가로막고 있었다. 

세상이 싫어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차라리 일찍 죽어 또 다른 생을 얻어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이루고 싶었다.

나는 젊은 시절 전장을 누비며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기도 했고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으니, 요즘 말로 산전수전을 모두 겪어, 지친 몸 쉬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이마엔 밭고랑만큼 깊게 파인 주름살 위에 백발이 성성한 노회 한 한낱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 하늘이 불러 돌아오라 한다고 해서 너무 빠르다거나, 억울해할 것도 없다.

다만 내가 왔던 곳에 다시 돌아갔을 때 그 염라국 왕에게 난 이승에서 무엇을 배워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이승에서 늘 그 빌어먹을 이력서 때문에 흘렸던 피 눈물을 더 이상 흘릴 수 없기에 용의 역린을 건드리는 만용으로 남은 내 삶을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세상을 경험하고, 내가 살아온 길이 바른 길이 었나를 확인해 보기 위해 이제 그것을 바르게 일러줄 학교를 가기로 했던 것이다.


나의 가까운 벗들이 삶의 일선에서 물러 앉아 손자들의 재롱을 즐기며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황혼의 노을을 노래할 때, 나는 기말고사의 시험지를 앞에 놓고 행복감에 빠진다. 운명의 역린을 건드려 역순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자신감과 행복감으로 하늘을 날 것 같은 쾌감에 전율한다.

성적이 무슨 대수인가? 내 남은 삶에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겠는가? 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만사를 다 잘할 수 있으랴? 남들이 나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면 또 내게는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남다른 것이 있으니, 그것이면 된 것 아닌가?

더 멀리 보고 더 높이 날기 위해 나는 오늘도 무거운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학교로 간다. 이 나이에 아직도 내게 녹슬지 않은 무지개의 영롱한 빛이 아주 밝게 앞길을 밝혀주고 있음에 거꾸로 가는 내 삶을 즐긴다. 이제부터 나는 숫자를 거꾸로 헤아려 가리라, 다섯, 넷, 셋....., 예순다섯 살의 고등학생으로 그렇게 살아가리라. 내 꿈이 미완성으로 남는다 해도, 그래도 적어도 내게 후회는 남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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