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rew Jan 30. 2022

연합 체육대회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이른 아침 5시 반쯤 일어나 밖으로 나와 하늘을 쳐다본다.

기상청의 예보는 장마전선의 북상으로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 했다.

아주 오래전, 학교 소풍이나 운동회 때면 어김없이 비가 내리던 이웃학교는, 학교를 신축할 때 커다란 이무기를 죽였기 때문이라는 전설을 떠올리며 오늘의 천기를 살핀다.

사실 어제만 해도 비가 올 것을 예상해서 준비를 하면서도 회의적이었는데, 이 아침의 하늘은 무슨 불만이 그리도 많은지,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고, 양 볼엔 심술을 가득 담은 회색의 색깔이기는 해도, 정작 눈물을 뿌릴 것 같지는 않았다.

날씨가 어떤들 연중행사인 연합회 체육대회를 연기할 일이 만무하고 보면, 하늘의 일기와는 별개 문제 일터, 일찌감치 집을 나서 체육대회가 열리는 경동고등학교로 향한다.


학교엔 먼저 나온 학우들이 학교별로 천막을 치는 등 어제 못다 한 준비가 한창이다. 교정의 하늘 위엔 체육대회의 감초로 만국기가 휘날린다. 어제 비가 올 것이니 만국기를 설치하느니 마느니 논란 끝에 우리 경복고에서 설치한 그 만국기가 분위기를 잡아가고, '우리는 하나다!'라는 서울 학생연합회의 대회 슬로건이 적힌 현수막으로 설레는 축제의 장에 힘을 보탠다.

학교별로 이미 마련된 체육복이 참석한 학우들에 한해서 지급되어 착용하고 명찰을 패용하니, 말 그대로 하나가 된 느낌이다.

제각기 자신의 학교 구호를 천막에 설치한다.

우리 학교의 '화합하고 노력하는 경복고와 함께 합시다!'를 비롯하여, 영등포고는 '최선을 다하는 영등포고 영원하라!'라는 구호와 함께 비장함(?)이 묻어 난다. '모든 일에 열정을 다하는 수도여고!'는 황금색 운동복으로 화려함을 뽐내고 '100년 전통의 경기여고와 함께 합시다!'라는 구호를 내 걸은 경기여고는, 정열의 빨간색 운동복을 입은 소녀(?)들의 미소가 화사하다.

이번 행사에 마당을 내어준 경동고는 주인답게 '경동고 방문을 환영합니다!'로 인사를 차린다.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선 각 종목의 예선을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08:00부터 우리 학교와 영등포고의 축구 예선을 서둘러 치루어야 하는데, 양 팀 모두 출전 선수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선수든 아니든 참석자는 모두 펠레가 되고 마라도나가 되어야만 했다. 나도 오늘만큼은 박지성이가 한번 되어 보자는 다짐을 하면서 무릎보호대를 차고 출전을 한다.

정신은 나이 따위를 이미 잊었지만, 몸은 아주 정직하다. 이럴 땐 정직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영등포 선수들은 진짜 고등학생 같다. 전력차가 심해 우리 학교의 절대적인 열세가 예상되었지만, 우리 팀도 꽤 선전하고 있었다. 전후반 15분, 총 30분 경기인데 그 15분이 그렇게 긴 시간이었다는 것을 그라운드에서 뒹굴며 깨닫는다. 마음과 볼은 저만치 가고 내 머리도 나를 앞서 달리는데, 내 두 다리는 한참이나 뒤에 나무늘보처럼 여유를 부리며 따라온다. 쯧쯧.... 여유 부릴 때가 따로 있지, 겨우 전반을 마치고 좀 더 젊은(?) 학우와 교체하고 만다. 멋쩍게 숨을 헐떡이며 들어와 여학생 급우가 건네주는 얼음물로 목마름을 달래고, 또 다른 종목에 출전하기 위해 체력을 충전한다. 모두가 선수이고, 모두가 응원단이다.


각 종목의 예선이 끝나고 공식 입장식이 시작된다.

1학년인 우리들은 처음 겪어 보는 대회이지만, 해마다 대회를 경험했던 재학생, 졸업생 선배들은 언제 준비했는지 차량과 소지품 곳곳에서 다양한 소품들이 등장하며 화려한 등장을 예고한다.

우리의 천막 한쪽에서 홍선생님이 김삿갓으로 분장한다. 졸지에 눈처럼 하얀 한복에 멋진 삿갓을 쓰고, 전설 속에서나 보던 멋쟁이 산신령의 괴장을 짚으니, 영락없는 새로운 홍삿갓의 탄생이다.

드디어 입장식이 시작되어 우리 학교 선수단이 교정을 돌아 내빈들이 자리한 본부석 앞을 지날 때, 우렁찬 폭음과 함께 오색 테이프를 뿜으며 축포가 발사되었는데, 사실 이것은 오발탄임을 나중에 우리 학교 학생회장의 설명으로 알게 되었다. 설명인즉, 우리 학교 입장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연합회 전체를 위한 마련이었는데 겁 없는 우리 1학년 회장 두 사람이 학교를 위한 과잉 충성으로 발사한 해프닝이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이 한방으로 시상식에서 경복고가 입장상을 수상하는데 크게 일조를 했으니, 다른 학교엔 미안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이렸다.


하늘에선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져 뜨거운 태양 아래보다는 오히려 시원해서 좋다.

우리 학교 학생회장의 사회로 행사가 시작된다. 개회선언을 한 경기여고 회장은 "오늘은 우리들의 날!"임을 선포했다. 문득 '5월은 우리들의 날'이라고 외치는 어린아이들을 생각한다. 하긴.. 일 년 삼백예순 다섯 날, 어느 하루인들 어린이날이 아닌 날이 없을 만큼, 온통 아이들 위주로 사는 부모들이 아니던가? 미국에서는 아버지 날도 있다던데, 오늘 여기 이 자리엔 묵묵히 만학의 길을 선택한 만학도들, 우리 자신을 위한 날임을 천명한 것이다. 어쩌면 일 년 중 하루만이라도, 이 나라에서 만학도의 날을 만들어, 배움의 길을 포기하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이바지했던 만학도들의 용기 있는 선택을 고무시켜줄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해본다.

또 공연히 콧등이 찡하고 가슴이 멘다. 이 자리에 극히 일부만 참석했지만, 저들의 뜨거운 가슴속에 서리서리 내려앉은 열정과 한이, 또 다른 벽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열어가는 기회로 승화되고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급우들과 학우들이 안타깝다. 다음엔 꼭 그들도 함께 참석하길 기원하며 한쪽에 마련된 각 대학 홍보물을 챙긴다. 오늘 함께 하지 못한 학우들에게 나누어 주며 설명이라도 해줘야겠다.


일부에서 중식을 하는 동안 체육관에서는 2부 행사가 진행 중이다.

우리 학교의 몇몇 1학년 회장들과 선배들이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각설이 한패와 점잖은 양반이 등장하며 고전 '최진사댁 셋째 딸.'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바로 우리 경복고의 작품이다. 이미 반짝이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은 경복고 학생회장의 진행으로 다른 학교의 특색 있는 공연이 펼쳐지고, 행운권 추첨까지, 이미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쯤 등장한 경복고의 '최진사댁 셋째 딸' 공연은, 오늘의 최우수상을 학교에 안겨주었다. 경복고 홍선생님의 열창으로 스승과 만학의 제자들이 하나 됨을 가슴 가득하게 간직한 하루였다.


오늘을 위해 수고하신 경기여고 회장님을 비롯한 각 학교 임원 선배님들, 또 경복고의 회장님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신 자랑스러운 선배님들, 이 추억을 나누어 주심에 깊은 고마움을 드린다. 비록 참석하지 못한 서울연합 소속 학우님들께 다음엔 우리 꼭 함께 하자는 부탁을 하고 싶다. 우리 반 급우들도 다음엔 꼭! 함께 하길 바란다.

그렇게 축제는 즐거운 뒤풀이 밤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고, 추억이 영그는 밤은 하염없는 아쉬움을 간직한 채 조금씩 깊어간다.  

이전 10화 친구야 학교 가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