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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Dec 29. 2021

등록하던 날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고등학교 입학 등록을 하러 가던 그날, 육십 오세인 나는 머리를 감고, T셔츠에 코르덴 양복 상의를 걸쳤다. 아직은 가는 겨울의 끝자락을 잡고 있어서 쌀쌀한 기운이 남아 서늘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머플러는 하지 않고 겉옷으로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주체할 수 없는 설렘과 흥분으로 얼굴도 달아오른다.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어둔 서류봉투를 다시 확인하고 버스에 오른다. 자꾸 주위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공연히 부끄럽다.

마치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경복궁역에서 내려 학교를 찾아간다. 초행이라 물어가면 되는 것을 묻기도 쑥스러워 학교 표시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한참을 걸어도 학교 표시가 없어 길가 정자에 앉아 쉬고 있는 미화원 아저씨에게 물어 학교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걷는다. 바쁠 일 없도록 넉넉하게 떠났으니 시간에 구애받을 일은 없어 걸음엔 여유가 있다.

골목길을 벗어나 다시 큰길로 나오니 경찰관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청와대가 가까운 곳이어서 그럴 것이라 짐작하면서 무전기를 든 사복경찰관에게 다시 학교의 위치를 물었다.


학교는 북악을 등에 업고 560년이나 되는 느티나무를 품에 안은 모습으로 무려 반세기를 돌아 교문을 찾아온 늙은 학생을 주눅 들게 하면서도 돌아온 탕아를 반기는 듯 활짝 팔 벌리고 있었다.

정문에는 내가 가야 할 곳을 안내해주는 표식이 붙어있었지만 정문 근무자에게 다시 위치를 확인하고 작은 언덕길을 오르니 우람한 느티나무 맞은편에 큰 바위가 비바람 맞으며 오랜 세월 이 학교의 교가를 가슴에 새기고 우뚝 서 있고, 또 다른 큼지막한 오석에는 조선시대의 화가로 이름을 남긴 겸재 선생이 한가롭게 누워 자연을 감상하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며 늦깎이 고등학생을 손짓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교정의 풍경을 모두 돌아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빨리 볼일을 마치고 이 어색함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에 안내표시를 따라 3층 방송고 교무실을 찾아 노크를 한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들만의 공간으로만 알고 있던 교무실에 노크라는 것을 오랜만에 해보는 것 같다. 숨 가쁘게 언덕을 올라온 탓도 있지만 민망하고 창피하다는 생각에 이마엔 식은땀이 흐른다. 내가 학교를 제때 다닐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 그렇게 큰 죄라고 내가 스스로 이렇게 주눅 들고 쩔쩔맬 일인가?

나 자신에게 스스로 화가 난다. 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 길을 찾아 뛰다시피 바쁘게 찾아온 내가 대견하지 않은가? 칭찬받을 짓을 한 것 같은데 가슴이 펴지지 않고 자꾸만 위축된다. 중학교 졸업증명서의 최종 확인자가 교육대학 총장인 것도 서류접수를 하는 선생님들을 또 놀라게 했나 보다.

내 최종학력을 증명해 줄 모교인 중학교가 없어지고 그 학교를 포함한 사범학교의 학적을 인수받은 교육대학 총장이 내 최종학력을 증명하는 셈이니, 흘깃 보기에 따라서는 교육대학 졸업생으로 착각할 만도 하다. 


입학원서를 쓰고,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등록금을 내고 영수증을 교부받는 것으로 접수를 끝냈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지금은 그냥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다.

3월 14일 오전 10시에 입학식이니 9시까지 오라는 말에 대답을 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내 나이 예순다섯, 집에선 아무 언질도 없이 이렇게 고등학교에 등록함으로써 1962년에 진학할 것을 이제 비로소 진학 수속을 마친 셈이다. 고등학교에 입학 등록을 하는 것이 참 오래도 걸렸다. 

잘 해낼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잘 해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할 뿐 미지의 세계로 가는 탐험가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고등학교는 내게 미지의 영역이 아닐 수 없으니 두려움과 기대로 마음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다. 자 다시 사는 거다. 내 새 인생을 거꾸로 시작하는 거다. 

그렇게 수없이 마음에 최면을 걸며 돌아오는 발걸음이 허공을 걷는 듯 가볍다. 이제 난 내 평생을 그리던 고등학생이 된 것이다.

그랬다. 나는 마침내 2010년 2월 1일 완전무장을 하고 전투에 나서는 병사의 그것처럼 비장한 마음을 다지며 경복고 부설 방통고에 전격 등록을 했다. 행여 결심이 무너질까 뒤돌아보지 않고 뛰어 들어가 등록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두 눈이 촉촉해진다.


오랜 벗들은 이미 각계에서 은퇴하고 새로운 제2의 삶을 설계한다는데, 나는 이제 그동안 꾸었던 악몽을 벗어놓고 소중한 꿈을, 마지막 꿈을 실현하기 위해 크고 높기만 해서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내 삶을 가로막았던 학교의 문을 두드려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나는 이미 위대한 전사(戰士)가 되었다.

방송 통신고등학교. 이곳이 내 꿈을 펼쳐갈 새 광장이다. 때 묻지 않은 설원의 대지위에 무지개 꿈을, 파랑새의 기도를, 그리고 황혼에 꿈을 아름답게 마음껏 색칠하고 노래하리라. 내가 벗어던진 위선의 옷들로 자유롭지 못했던 지난 내 삶을 반면 거울 삼아 새로운 꿈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 것이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을 버리리라. 꿈을 이룬 보통의 사람들이 그 나이에 무슨 학교냐고 비웃는 소리에는 차라리 악몽을 꾸어봤느냐고 선문답으로 되물어 주리라. 나는 지금 유학 중인 내 딸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이면 난 대학생이 되어 있어야겠다. 

아비의 아픔을 이해하고 학교에 가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해준 그 애가 돌아올 때, 밭이랑처럼 깊게 파인 주름진 얼굴로, 그러나 꿈을 이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로, 당당하고 환한 웃음을 보여주고 싶다.


오늘도 저녁 하늘을 진홍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석양을 바라보며 길고 긴 동면에서 깨어나 새봄을 맞는 열일곱 소년의 마음으로 아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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