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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Dec 29. 2021

입학식 하던 날

홍윤기 수필집 "예순다섯 살의 고교생"_만서 홍윤기

마침내 입학식 날이 왔다. 입학식 날 하늘은 맑았다. 전방에 인왕의 흰색 바위가 마치 백호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금년 경인년을 白虎의 해라 하지 않았던가? 그 유명한 인왕산 호랑이를 잠재우던 북악은 채 다듬어지지 않은 동량지재의 요람 경복을 품어 백호와 함께 천년 나라의 내일을 예비한다. 인왕의 강건한 기상과 북악의 천년 정기를 뽐내며 그렇게 그곳에 우뚝 서 있었다.


입학을 위하여 모여드는 오늘의 주인공들... 재학생이나 신입생들 모두가 제법 세상을 살아온 연륜이 엿보여 머리에 군데군데 서리가 내려앉았거나, 이마에 삶의 계급장을 훈장처럼 달고 있다. 개중엔 앳된 젊은이들이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지만 그들마저도 일반학교 학생들보다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른바 만학도(晩學徒)들이다. 걱정과 쑥스러움으로 조바심하는 신입생들보다 재학생 선배들은 진정 고교생인 냥 신나고 활기차다. 그들은 이 안쓰러운 동병상련의 새로운 후배들의 입학을 축제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차츰 그 분위기에 동화되면서 나의 걱정과 근심이 기우였음을 인정하며 실로 반세기 만에(?) 열여섯 소년이 되어간다. 아들 같은 옆의 급우도 이미 반세기 전의 그 친구들처럼 정겹다.


입학식이 시작되기 전 선배들이, 자신들이 소속된 동아리 홍보에 열을 올린다. 내 아들과 딸의 대학 입학식 때의 풍경과 흡사하다. 천천히 생각해도 될 일이지만 그 분위기에 젖어 선뜻 "문학 동아리"에 가입한다. 내빈들이 자리를 채워가면서 왁자지껄한 어수선함이 점차 조용해지고 숙연해진다. 늘 그렇지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면 울컥하고 치미는 것이 있어 힘들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슬픔보다 더 환희를 느낀다. 허긴 지금 난 내 잃어버린 세월을 빼낸 열여섯 소년이니 타임머신을 타고 반세기 전으로 돌아간 셈이다. 신입생 대표 선서로 이어지는 식순에 따라 현실의 신입생 위치로 돌아온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받아야 할 축복을 조금 늦게 받는 것뿐이다."

"배움에 빠르고 늦음은 없다."라는 학교장 환영사에 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힌다. 목이 메고 콧등이 찡하다 울컥 뜨거운 것이 명치를 때리고 올라온다. 어쩌다가 이제야 이곳을 찾았나? 너무 아쉽다. 왜? 지금껏 모르고...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삼십년만 먼저 알았어도 내 잃어버린 지난날이 그토록 삭막하진 않았을 것을... 주위를 돌아본다. 그래... 삼십년 전의 나와 같은 다른 학우들을 보며 그나마 그들은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식이 끝나고 담임 선생님의 인솔로 내가 공부할 교실에 들어가 작은 책상에 앉는다. 조금 어색하다. 나뿐 아니라 다른 급우들도 마찬가지겠지? 몇십년 만에 아이들 책상에 앉으며 감회가 새롭겠지만 어색하긴 마찬가지 일 것이 틀림없다. 선생님께서 공지하시는 앞으로의 학교생활, 수업방법 등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듣고 메모한다. 기왕에 시작했으면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가슴 저 밑에 잠들어 있던 승부욕인지, 욕심인지가 꿈틀거린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모르는 것뿐이니, 초등학교 1 확년짜리가 "하나, 둘, 셋, 넷"하며 선생님을 졸졸 따르는 모습과 같아 실소를 머금는다. 그렇게 선생님을 따라 식당으로 갈 때는 이미 많이 익숙해진 우리 반 급우들, 자세히 보니 모두 훤칠한 미남, 미녀들이다. 누가 이들이 이제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라 하겠는가? 오늘은 신입생 환영을 위해 학교 측이 준비한 점심을 먹고 다시 오후 수업으로 들어간다. 저들 모두 각자가 지금의 위치가 무엇이든지, 어떻게 얼마큼 사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들의 지난 못다 한 사연들을 책으로 쓸 수 있다면 제각기 모두 한, 두 권의 소설이 되고 남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 우리 반의 '김학철 급우'와 '주인숙 급우'는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 향학열에 불타 예까지 왔다. 앞으로 우리 반 친구들이 그들에게 잘해줘야 할 텐데.... 건장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김병택 급우'와 이름이 특이해 잊지 못할 것 같은 '육갑생 급우'는 즉석에서 나를 형님으로 호칭하겠다고 정해버렸으니 든한 급우이자 아우들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반 최고령인가 보다. 우리 반 막내는 열일곱의 홍안 소년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 귀한 입학식이 있었던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자락으로 가슴에 간직될 것이다. 우리 반 급우 모두 귀한 내 동기동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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