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음악이 되며 음악은 내가 된다
※ 광주매일신문에 연재한 글입니다.
KBS 매주 일요일 밤 11시에는 우리나라 정상급 연주자들의 무대를 방송한다. 지난 방송에선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연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1협주곡 1번을 KBS 교향악단의 협연으로 진행했다. 워낙 유명한 곡이고 최고의 난이도를 보이는 곡들이라 내심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연주를 지켜봤다. 정확한 테크닉과 흐트러짐 없는 모습에 놀랐지만 연주에서 최선을 다하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이 큰 감동을 줬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의 연주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아일체’(物我一體). ‘일체 대상과 그것을 마주한 주체 사이에 어떠한 구별도 없으며, 주체와 객체의 분별심이 사라져 조화를 이룬 진실한 세계를 가리킨다’는 뜻이다.
불교에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심우도’(尋牛圖)라는 그림이 있다. 모두 10개의 그림으로 구성돼 있으며, 소는 인간의 본성, 목동은 자신을 찾고 깨달아 가는 수행자로 비유된다. 수행자(자신을 찾고 깨달아 가는 나 자신)는 소(자신의 본성, 인간의 본성)를 찾기 시작한다. 꾸준히 찾는 수행자는 발자취를 찾게 되고 소의 뒷모습부터 전체 모습까지 찾게 된다. 발견된 검은 소는 사납고 날뛰며 길들여지지 않았다. 수행자는 포기하지 않고 소의 고삐를 잡으며 몽둥이와 채찍을 들고 소를 길들인다. 소의 색깔은 온순해지고 흰색으로 변하며 수행자는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로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 돌아온 수행자는 소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자신이나 소나 모두 실체가 없는 존재하지 않는 공(空)임을 깨달으며 동그라미로 그림을 채운다. 산과 물로 표현해 번뇌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경지를 이르며 중생을 위해 속세로 들어감으로써 그림을 마친다.
‘심우도’를 통해 불교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수행자가 소를 찾고 그것 자체가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아무런 편견이 없이 사물을 바라보며 존재함을 감사하는 자세, 그리고 그것을 함께 하는 자세가 예술가에게도 필요하다.
도(道)를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수행자에서만 ‘심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닌 예술가 또한 자신을 발견하고 깨달음의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을 찾아가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부족한 모습을 채우며 온전한 모습을 위해 노력하는 나 자신은 꿈꾼다. 그리고 중생을 위해 속세로 들어가는 승려처럼 자신의 예술적 언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와 비슷한 말, ‘리더십’이란 말이 있다. 리더십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영향력이다. 우리는 다양한 영향력 안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돈의 영향력, 권한의 영향력, 지식 영향력, 기술의 영향력 등등. 그 중에서 예술가 영향력은 정신을 지배하고 정화시켜주는 영향력이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예술가는 영향력을 받는 입장이 아닌 영향력을 주는 입장이 더 크다는 점이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르고 싶어 한다. 음악이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음악이 되는 것이다. 음악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나의 모든 것을 음악으로 보여주며 껍데기 같은 거추장한 모습은 없어지고 감추는 것이 없는 오직 벌거벗은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진정한 예술의 힘이며, 생명이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첫 번째, 나의 이상향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과 가치관을 발전시킨다. 음악(예술)은 나를 표현하는 껍데기이자 수단에 불과한다. 결국, 나의 생각과 뜻을 음악을 통해 관철시키는 것이다. 끊임없이 나에게 물어봐야 한다. ‘나는 어떤 이상향을 가지고 말하고 싶은가’, ‘말하고 싶은 이유가 분명하며 그만큼 가치가 있는가.’
두 번째, 음악을 상황에 맞게 설정하며 테크니컬하게 구연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세 번째,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음악은 진동이며, 소리(音)로써의 전달이다. 그것과 더불어 미술, 문학, 무용 등 다양한 분야와의 소통을 더해 보다 깊은 소리를 만들어내자.
네 번째, 장인정신을 가지고 음악을 대하자. 그 뜻은 ‘한 가지 기술에 통달할 만큼 오랫동안 전념하고 작은 부분까지 심혈을 기울이고자 노력하는 정신’이라는 뜻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큰 무대든, 작은 무대든. 어느 누가 오든지 하나라도 빈틈이 없는 노력을 하자.
다섯 번째, 게으르지 말자. 무엇이든 끊임없이 생각하고, 좋은 생각이 나온다면 실행한다. 설사, 생각보다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실행했다는 것 자체로도 성공한 것이다. 머뭇거리고 주변 눈치 살피다가 이도저도 안 되는 상황을 여럿 봤다.
여섯 번째, 모든 곡에 ‘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다’는 주제를 가지고 창작을 하자.
일곱 번째, 언제나 자유로운 꿈을 꾸자. 꿈이 꾸는 자의 음악은 분명히 다르다.
여덟 번째, 자신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주제가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답을 내놓았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음악, 생명이 있는 음악이다. 음악은 무의식의 세계로 이끄는 순례자이자 나침반이다. 가슴 속에 들어가며 뼈에 사무치는 음악이거나 피부에 온전히 닿아 그대로 흡수되는 음악, 뭐든지 좋다. 그 안에 생명이 있다면….
예전에 연주할 때 겉치레에 치중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럴 때가 되면 신기하게도 관객은 금방 알아채며 부정적인 의견을 전달해줬다. 무엇을 보여주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의 모습에 집중해 진정한 나의 모습에 대면하고 발견하며 표출했을 때 예술가 자신에게도 관객에게도 감동과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벌거벗은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다.
어쩌면 육체의 껍질을 벌거벗는 것보다 마음의 본질의 벌거벗음을 표현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표현의 노력을 한다는 것은 본인의 상처를 극복하며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반증일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생소한 환경에 도전을 받고 있다. 그래서, ‘새로움’ 을 요구한다. ‘새로움’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게 더욱 집중하는 예술가가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는 예술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