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자가 보는 우리 역사,
고조선부터 정상국까지

'자유로 본 시민 교양론 - 제6장-2'

by 박대석


제6장-2 자유주의자가 보는 우리 역사:

고조선부터 정상국까지


역사의식의 중요성


이암 선생은 "나라는 인간에 있어 몸과 같고, 역사는 혼과 같다.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보존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몸이 혼을 잃으면 존재할 수 없듯이, 나라도 역사가 없으면 정체성과 생명력을 잃는다.


한반도는 수천 년간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질서 속에서 존재해 왔으며, 근현대에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입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현재 우리는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 하에서 발전을 이루어왔다. 우리 역사를 바로 알아야 자유주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잃어버린 대륙의 기억, 고조선과 단군의 진실


필자가 작성한 단군신화와 중국, 로마, 일본 등 신화 요약표

한국의 상고사와 고대사가 제대로 밝혀져야 혼의 첫 단추가 바로 잡힌다.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과 역사를 알려면 고조선과 단군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심백강 박사 등이 중국의 사고전서 사료에서 찾아낸 바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압록강 이남 대동강 유역의 변방 소국이 아니었다. 지금의 베이징시, 진황다오시를 포함한 동북지방 대부분이 고조선 영토였다. 고조선은 단순한 부족국가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고대 국가였다. 요동반도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문화를 발전시켰다.


한민족은 중원에서 9개 제후국인 동이(東夷) 국가를 거느린, 로마보다 더 위대한 동아시아 최초이자 가장 오래 지속된 제국이었다. 현재의 반도가 아니라 대륙의 DNA를 가진 민족이었으나, 반도로 밀려난 이후 중국에 천 년 이상 괴롭힘을 당했다. 지금도 진행형이다.


단군 신화 역시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치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서사다. "홍익인간"의 이념은 특정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이 아닌 모든 인간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가치와 맥이 닿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군신화를 스스로 폄하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일본의 남신 이자나기와 여신 이자나미, 로마의 로물루스와 레무스, 중국 창조신 반고 모두 신화적 인물을 국가의 시조로 삼아 국가 기원에 신성성과 정통성을 부여한다. 신화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과 결속, 국가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정신적 기둥이다.


중국과의 천년 투쟁사, 원교근공의 교훈


분명한 것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이다. 가까운 중국의 힘이 세지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그러나 멀리 있는 미국은 그렇지 않다. 역사가 증명한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연나라는 고조선에 큰 위협이었다. 기원전 109년 한나라 한무제의 침공으로 고조선은 왕검성이 함락되며 멸망했다. 수백 년간 유지한 한나라의 한사군은 쇠락해진 틈을 타 고구려가 몰아냈다.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총 4차례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단행했으나 실패했다. 고구려-수나라 전쟁은 중국의 통일왕조를 상대로 한반도 왕조가 완승을 거둔 예외적 사건이었다. 고조선에 이어 고구려는 만주 등 중국 북방에서 중국과 당당하게 자웅을 겨루는 나라였다.


당나라 역시 태종 이세민 대에 대규모 원정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고구려는 두 차례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사대주의, 자발적 종속의 길


고려는 상당 기간 동북아시아의 주체적 행위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당의 멸망 이후 중원이 어지러워졌기 때문이다. 요나라의 침공을 모두 격퇴한 고려는 송나라에 대해서도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했으나, 몽골 제국이 등장한 뒤에는 부마국으로 전락했다.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세워진 조선은 유교 사상에 따라 제후국으로서 중국을 상국으로 모셨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까지 약 500년간, 한반도 왕조는 중화 질서에 자발적으로 편입되었다. 한반도에 갇힌 조선을 중국 왕조가 왕세자 이름까지 정하며 대리 통치하는 속국이 되어버렸다.


1592년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순신 덕분이기도 하지만, '고려천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조선에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명나라 만력제의 도움도 컸다.


근대화의 갈림길, 일본의 성공과 조선의 실패


청나라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알려지자 서구 열강들은 늑대처럼 달려들어 중국을 수탈했다. 일본은 1853년 미국에 강제 개항당한 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 정부를 수립했다.


조선은 1866년 병인양요에서 프랑스를, 1871년 신미양요에서 미국 원정함대를 격퇴했으나, 일본과 달리 불공정 조약을 통한 개항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이 조선에 먼저 준 근대화 기회를 해석하지 못했다.


1653년 네덜란드 상선이 표류했을 때, 그 배에는 대포와 조총이 가득했고 항해 전문가와 무기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조선의 그 누구도 이런 문물에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조선은 철 지난 이론인 주자학으로만 세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도 정답으로 적용하지 않고 세계를 열린 시각으로 보며 호기심을 앞세웠다.


조선은 뒤늦게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나라의 제도와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의 근대화는 신식 무기 몇 개를 새로 장만하는 수준에 그쳤다. 반면에 일본은 서양 소총을 도입하면서 메이지유신을 통해 국가 시스템을 대개조했다.


식민지배와 해방,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등장


일본제국에 의한 한반도 강점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6년간이었다. 유럽 열강에 식민 지배당한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으나, 현대 주권 국가로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였다.


1920년대 말 대공황으로 일본의 자유주의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군부가 폭주하기 시작하고, 일본은 삽시간에 군국주의로 변모했다. 한반도는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구현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락했고, 온갖 수탈과 강제징용이 이뤄졌다.


일제의 무자비한 지배는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빼앗았을 뿐 아니라 한민족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일본이 우리 민족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펼친 정책은 깊은 반작용을 불러일으켜 한민족의 민족정체성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으며, 여기에 반일 감정이 따라붙었다.


분단과 한국전쟁, 자유 진영으로의 편입


1945년 8월 일본 항복 후, 이미 이념 경쟁에 돌입한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정치체제를 놓고 대립했다. 소련은 공산주의 정권을,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정권을 원했다.


UN 주관 하에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만 단독 선거가 진행되어 이승만이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이 되었고, 9월 9일에는 김일성이 38도선 이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UN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유권자들의 자유 의지에 따라 수립된 합법적 정부라고 선언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확고히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엔군과 미군의 지원으로 자유를 지켜낸 경험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각인시켰다.


무려 63개 나라가 UN군에 참전하여 대한민국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서명으로 한반도는 분단이 고착화되었지만, 대한민국은 자유 진영의 일원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냉전기 자유 진영의 성공 모델, 한미동맹의 탄생


한국전쟁 휴전 후 이승만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국을 압박해 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 주둔을 얻어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 시 주한미군을 필두로 미국이 곧바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과 소련 간 전면전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은 전쟁의 참화에서 상당히 안전해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수출 주도 경제를 성공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국민의 근면함과 성실함, 그리고 산업 발전을 체계적으로 견인한 경제 정책 덕택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자유 진영에 속했기 때문이라는 점 역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1967년 WTO의 전신인 GATT에 가입했다. 덕분에 대다수 자유진영 소속 국가로부터 특혜관세를 적용받을 수 있었고, 비차별 원칙에 따른 무역상의 혜택도 얻을 수 있었다. 상업을 천대한 조선왕조 500년을 거친 우리 국민이었지만, 일단 자유무역질서에 편입된 뒤로는 여느 민족 못지않게 세계를 무대로 종횡무진 활동하기 시작했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민주주의의 싹이 꺾이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도 우리가 자유 진영에 속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인권을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국가였고, 가능만 하다면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선호했다.


미국은 1972년 CIA를 동원해 박정희 정권의 김대중 암살 시도를 막아냈고,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에도 김대중을 보호했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는 주한미군을 통해 군부가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지 못하도록 경고를 보냄으로써 우리 국민이 직선제 개헌을 얻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팍스 아메리카나와 대한민국의 전성기


냉전 종식과 함께 도래한 팍스 아메리카나는 대한민국이 단군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 데 결정적인 토양이 되었다. 북한의 침공 위협이 사실상 사라졌고, 소련이 해체되고 중국도 뒷배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북한은 대한민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대외 차관에 의존하던 우리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뒤바꾸었다. IMF의 워싱턴 컨센서스에 입각한 개혁·개방 요구에 따라 금리 인상, 자본시장 개방, 기업 부채비율 인하, 은행 자기 자본비율 제고 등의 개혁이 단행되었다.


수많은 기업과 가정이 해체되고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는 등 사회적 흉터가 생겼지만, 한국인은 여러 부작용을 악착같이 버텨내며 국가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외환위기를 통해 체질 개선에 성공한 대한민국 경제는 더욱 탄탄해진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2000년대 들어 양적·질적 성장을 모두 이뤄낼 수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적 성숙과 시행착오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세웠으나, 이 과정에서 한미관계가 다소 소원해지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관계 복원을 우선시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과 한미동맹 발전에 주력했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추진했으나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탄핵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포용국가를 표방하며 남북관계 개선에 주력했으나 북한의 지속적인 핵 개발로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한미동맹 강화를 최우선으로 삼았으나, 2024년 12월 비상계엄 선포로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를 초래했다. 이는 한편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위기 상황에서도 헌법과 법치주의를 통해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준 사례였다.


한국 좌익의 변신술

필자 작성

해방 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소련을 통해 들어온 공산주의는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평등한 세상"이라는 매력적인 구호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일제강점기를 겪은 서민들에게 이런 메시지는 희망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소련이 무너지자 PD(민중민주주의) 계열은 힘을 잃었고, 대신 북한의 김일성 주체사상을 따르는 NL(민족해방) 계열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런데 북한이 한국에 비해 약 60배나 가난해지며 체제 경쟁에서 완전히 패배하자, 이들은 또 다른 변신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중국이 부상하자 친중을 넘어서 굴중 노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게 정말 위험한 신호다. 중국의 일당독재와 북한의 세습독재를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한국도 그런 길로 가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과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일부 세력이 이권 카르텔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식 토지 국유화 같은 정책이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정권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민주화 세력의 타락은 자유민주주의의 뿌리를 흔드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한국은 한국전쟁의 폐허와 북한·중국·러시아 등 전체주의 반미연대 국가에 둘러싸인 위험, 그리고 국내 좌익세력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경제·국방·무역 강국으로 성장했다.


전후 산업 기반이 거의 없던 나라에서 수출주도형 성장과 기술 개발로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6위 수출국이 되었으며, 국방력도 첨단 무기 개발과 방산 수출로 세계 상위권에 올랐다. 이러한 정상국으로 올라선 성취는 불리한 지정학과 내부 갈등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미동맹 중심의 전략과 국민적 역동성이 뒷받침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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