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주제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뜻하는 ‘화양연화’였다. 당연하게도 첫사랑에 관해 썼고, 다들 아름다운 로맨스라며 좋아해주었다. 그 시절은 설레는 꽃향기가 진동하고, 불꽃이 터지듯 화려하게 그려졌다. 살아온 날을 구분 짓는다면 그를 만나기 전과 후가 될 거라 생각했고, 반복되는 일상은 버려진 화분 속 마른 꽃가지처럼 메말라갔다.
어젯밤 꿈에서는 결혼을 앞둔 신부였다. 새하얀 드레스를 차려 입고 무척 행복한 표정으로 야외 결혼식장을 거닐고 있었다. 갑자기 할 말이 생각난 나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급하게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오래된 사진관 같은 구조의 집은 전면이 유리로 되어 밖이 훤히 내다 보였다. 빈 집 의자에 털썩 앉아 밖을 보며 오래 기다리다 그를 발견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는 척하려 했지만 여자와 함께 있었다. 모습이 많이 달라졌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둘은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도 계속 다투었다. 여자는 화가 나서 자꾸만 손을 빼려 하고, 그는 놓지 않으려 세게 잡아당겼다. 여자는 언성을 높이며 결혼을 종용했고, 그는 아버지 돌아가신 지도 얼마 안 됐다고 말했다. 여자는 ‘더 이상 엄마한테 핑계 댈 말도 없고, 욕하고 싶은 걸 지금 참고 있다’며 노려보았다.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 텐데, 돈이라든지 부모의 반대라든지 그런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무척 답답해 보였고, 안쓰러웠다. 내가 아는 그는, 감당 못 할 문제를 안고 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깨끗이 버리고 갈 것이다. 여자도 그걸 알았는지 불안한 얼굴로 원망을 터뜨렸다. ‘너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고 했다. 결국 울먹이던 여자가 헤어지자고 먼저 얘기를 꺼냈고, 늘 그랬듯 그는 ‘기다려봐, 내가 해결해 볼게.’하고 무기력하게 말했다.
한동안 둘이 싸우는 걸 지켜보다 집으로 돌아갔다. 어릴 적 매일 오가던 낯익은 시장 골목을 지나쳐 가는 길에 갑자기 멈춰섰다. 그의 집에 무언가를 놓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서 있었다. 몇 번씩 주머니를 뒤지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어 초조해졌고 다시 돌아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주머니에 있던 것도 그대로 있고, 벗어서 손에 들었던 조끼도 그대로 들고 있다. 놓고 온 건 없었다. 놓고 왔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사실은 소리 지르며 화내는 여자가 바로 나였다. 나는 이토록 불완전하면서도 그는 완벽하길 바랐다. 사랑 하나로 모든 문제를 극복해주길 바랬다.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는 집안의 자랑거리였던 그가 부모를 거역하는 건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유약함과 부드러움에 이끌려 사랑했으면서, 단호하게 부모를 거스르지 못한다고 미워도 했다.
헤어지는 날, 그의 옷 속으로 차가운 손을 집어넣으며 괜스레 장난을 쳤다. 좋은 기억만 남겨주고 싶어 억지로 더 크게 웃었다. 전화를 차단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에도 말없이 돌아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 뒤를 쫓아 넘어질 듯 내달리는 그도 흔들리고, 등에 맨 가방도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렸다.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뛰어오는 그를 외면하며 커튼을 치고 울었다. 마치 어제 일처럼 장면이 새겨졌다.
무언가 두고 온 기분에, 빈손을 바라보고 빈 주머니를 뒤지며 살았다. 꿈을 깨서야 알았다. 두고 온 건 없었다. 스쳐간 청춘의 순간을 쥐고 놓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이제 불완전한 나를 껴안고 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