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핸드크림시점

by 바다숲

그녀의 피부는 굉장히 건조하다. 나를 듬뿍 짜서 손바닥이 넘치도록 바른 다음 얼굴에도 두드린다. 사람들이 쳐다봐도 어쩔 수 없다. 손만 아니라 온몸의 피부가 건조하기 때문이다. 엄지와 검지를 문지르면 지문에서 하얗게 각질이 떨어지기도 한다. 자꾸 문지르면 지문이 아예 사라질 것 같다. 이러니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한다.


집에서는 내 친척뻘인 대용량 바디로션을 사용한다. 나를 좀 아끼는 것 같다. 아낀다는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무려 오 년 전에 받은 물 건너온 핸드크림은 절대 쓰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넘어온 그 아이는 사진만 주구장창 찍어 올리더니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오지게 아끼다 똥 됐다는 말이 딱 맞다. 다 있는 가게에서 천원 주고 산 나만 쓴다. 한 번에 다섯 개씩 사도 금방 쓴다.

외출했다가 30분도 채 안 돼서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 그게 내가 없어서라니, 중독증세가 심각하다. 한때는 소금빵에 중독돼서 매일 아침 빵집으로 달려가고 점심은 주 5일 내내 회사 근처 순댓국집만 갔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만큼 빨리 질리기도 해서 애착했던 것도 가차 없이 버린다. 소금 빵은 이미 버림받았다. 만나고 너무나 살이 쪘기 때문이다. 소금빵 입장에선 ‘네가 나를 만나 살 찐 게 아니지 않느냐. 너는 원래 쪘지 않냐.’ 며 억울하겠지만, 아무튼 타이밍 맞게 뱃살이 축 늘어져버렸다.


커피와 나, 두 가지는 대쪽 같은 취향이었다. 그런데 커피는 요즘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위염을 달고 살고, 카페인 때문인지 잠을 잘 못 잔다. 가장 큰 문제는 커피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아마 커피도 곧 아웃될 것이며, 나만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가성비 끝판왕에 부작용은 없고, 값을 매길 수 없는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의 실크처럼 미끄러지는 촉감을 굉장히 좋아한다. 언젠가 젖은 손을 휴지로 닦아주고 손가락 사이사이 핸드크림을 발라준 사람이 있었는데,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스카프를 좋아하는 것도 멋쟁이라서가 아니라 감촉 때문이다. 원래 부드러운 시폰 소재의 옷을 즐겨 입었는데 요즘엔 잘 안 입는다. 몸매를 드러내는 부들부들한 옷들은 지난 대청소 때 다 갖다 버렸다. 아주 잘한 것 같다. 과거에 어울렸다고 해서 지금도 어울리라는 법은 없다. 과거의 것은 과거로 보내야 한다는 걸 그녀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녀는 불안할 때, 나를 듬뿍 바른 손바닥을 코에 대고 깊숙이 들이마시며 안정감을 느낀다. 촉감뿐 아니라 후각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길을 가다 우연히 어떤 향을 맡으면, 오래 전 그 냄새와 같이 있었던 사람, 사건까지 다 소환해 낸다. 어디선가 헤이즐넛 향이 훅 풍겨오면 순식간에 20년 전 겨울로 돌아간다. 자취방에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뛰어간 학교 앞엔, 헤이즐넛 커피를 내려 마시던 동기의 방이 있었다. 따뜻한 방에서 머리를 말리는 내내 감돌던 향기는 그녀의 유일한 호사였다.


특히 아기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땀내 섞인 젖비린내를 굉장히 좋아한다. 조카가 어릴 때 목덜미에 코를 대고 계속 킁킁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좋아하지만 아기가 없다. 적지 않은 나이와 저질 체력도 걱정일 테고 아기보다 자신을 키우는 게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후각에 예민하면서도,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는 맡지 못하는지 향수를 쓰지 않는다. 모순 덩어리인 그녀는 가끔 외로워 보인다.


다한증을 콤플렉스로 여기는 것 같다. 누가 악수하자 하면 피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 제가 손에 땀이 많아서요. 인사로 대신해도 될까요.” 하고 배꼽인사를 하곤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땀이 나지 않을 때, 일부러 나를 듬뿍 발라 계속 문지른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몸이 안 좋을 때는 땀이 나지 않았다. 땀을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바르면 땀샘이 열리고 그 구멍에서 의욕도 함께 샘솟는 것 같다. 좋아하는 건지 이용하는 건지 헷갈리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건 확실하다.

건조했다가 금방 축축해지는 피부만큼 그녀는 ‘적당히’라는 말이 사전에 없는 사람이다. 열정으로 달렸다면 쉬어야 하는데, 기어이 오르고 내달려서 인대가 늘어나고 끊어져야 비로소 멈춘다. 결국 달린 거리보다 훨씬 뒤쳐지는 셈이다. 조바심이 날 땐, 부드러운 촉감과 향기 속에서 잠시 멈췄으면 좋겠다. 걸음을 재촉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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