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눈떴을 때 깜짝 놀란 건, 주인이 겨우 15세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 어린 소녀가 나를 커다란 국그릇에 타서 에이스 한 통과 함께 매일 먹는 것이었다. 소녀의 엄마는 바빴는지 찬장 안 통에 가득 담겨 있던 내가 바닥을 드러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어린 입맛에도 내가 그렇게 맛있나? 하긴 설탕을 저렇게 들이붓고 프림을 밥숟가락으로 푹푹 떠서 넣으니 맛이 없을 리가 없지. 휴우. 나는 저 머나먼 에티오피아에서 태어나 이곳까지 힘들게 왔단 말이야. 타지 않게 적당한 시간을 로스팅해서 고소하면서도 약간의 산미가 있는 그야말로 황금비율의 조화를 이루는 고귀한 존재라고. 나만의 고유한 풍미를 설탕으로 싹 덮어버리고 말이야. 촌스럽게. 또또, 왜 저렇게 쫓기듯이 벌컥벌컥 들이켜는 거야? 교양머리 없이. 쯧쯧.'
아무래도 주인을 잘 못 만난 것 같았다.
그녀는 여상을 졸업해서는 반도체 생산직에 취업을 했다. 회사에 다닐 땐, 나를 잘 찾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퇴사를 하고는 속된 말로 죽을 때가 된 건지, 생전 안 하던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갔다. 또 아주 어려운 시험을 보겠다고 나서서는 두 시간씩 자고 흔하게 밤을 새웠다. 그러면서 많게는 하루 열 번까지도 나를 찾아댔다. 나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여 그녀의 뇌를 정리해 암기할 공간을 만들어 주고, 노트필기할 수 있도록 손목에 혈액을 공급해 주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없으면 손을 약간 떠는 것도 같고 많이 불안해 보였다. 의지할 데 하나 없이 급기야 금단증세를 보이는 그녀가 점점 안쓰럽고 걱정스러웠다.
'저러다간 속이 남아나질 않겠어. 암만 봐도 공부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은데, 저러다 진짜 큰일 나지.'
그렇게 무려 5년을 코피를 흘려가며 버티던 그녀는 결국 패배를 인정했다. 집안을 가득 채웠던 책을 처분하는 날이었다. 냄비 받침대로도 한 번 쓰지 않던 귀한 책들을 전부 내줬는데도 고물상 아저씨는 책장을 버려주는 대가로 책값을 퉁 치겠다고 말했다. 의뭉스럽게 웃는 아저씨 앞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군 그녀를 보는 게 힘이 들었다.
그녀는 몇 년 만의 여행이자, 처음으로 혼자 떠난 강릉에서 나를 앞에 두고 멍하니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봤다. 하늘도 슬픈 듯 비가 추적추적 내려 사방이 온통 우울한 회색빛이었다. 항상 세상을 향해 반짝이던 그녀의 눈이 처음으로 초점 없이 멈춰 서 있었다.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바람이 통했는지, 세상 모든 피곤을 짊어진 듯했던 표정이 나를 들어마시자 점차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취업한 평생교육원에선 내가, 지상 최고의 발명품인 커피믹스와 일반 커피가루, 이렇게 두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그녀는 믹스된 나를 더 좋아했는데, 구두쇠 원장이 손님 접대용이니 먹지 말라고 자꾸 눈치를 주었다. 그녀는 눈칫밥 와중에도 다른 선생님이 원장에게 말 걸며 시선을 끄는 동안, 몰래 한 주먹 가득 꺼내 오면서 키득거렸다.
나는 그녀의 대범함과 낙천성이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녀를 맘에 들어 한 게 나뿐만은 아니어서 처음 보는 남자와 마주 앉아 나를 마신 횟수만 해도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꼭 나를 앞에 두고서 내숭을 떨며 웃고 눈을 맞추었고 사랑이 시작되었다.
사랑이 깊어갈수록 어느새 나보다 술을 더 자주 찾아서 섭섭했다. 문제는 사랑이 끝나고 나서도 그 술이란 놈은 끈질기게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는 것이다. 매일같이 맥주와 새우과자를 들고 귀가하는 그녀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린 후엔 결국 내게로 돌아왔다. 역시 내가 그녀의 최애였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나를 준비한다. 유리컵에 크게 한 스푼 넣고 소량의 뜨거운 물을 넣어 빠르게 녹인다. 각 얼음을 잔뜩 붓고 마지막으로 얼음 사이 공간에 우유를 좍 붓는다. 다시 마구 저으면 차갑고 맛 좋은 내가 완성된다. 이제야 풍미에 눈을 뜬 건지 다이어트 중인 건지 몰라도 시럽은 뺀다. 허구한 날 다이어트를 해도 나만은 끝까지 놓지 않는다. 눈을 감고 길게 음미한다.
"음~ 그래. 바로 이 맛이지."
그럼 나는 식도를 타고 바지런히 내려가 팔다리에 힘을 주고 쾌변을 약속했다. 한 번은 나 때문에 남편과 싸우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남편은 잔소리가 많은 스타일인 듯했다. 빈속에 나를 먹지 말라고 뭐라 뭐라 했고 그녀는 이십 년 넘게 이렇게 살았지만 아주 멀쩡하다며 항변하고 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녀가 이길 것이다.
가끔 '시댁'이라는 곳에 가면 나를 잊는다. 아니, 그곳에선 눈뜨면 밥 차리고 돌아서면 설거지하고, 틈만 나면 방을 쓸고 닦아야 해서 나를 챙길 여력이 없다. 집에선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라 굉장히 낯설었다. 한 오 년쯤 지나자 꾀가 났는지, 아침 운동을 핑계 삼아 나와서는 나와 밀회를 나누었다.
백수가 된 지금도 눈뜨면 나를 찾고 도서관이나 카페로 이동하면 또 나를 사 먹는다.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지 계산기 두드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 잔에 얼마니까 한 달이면 얼마, 1년이면 또 얼마, 10년을 모으면….”
그렇게 두드리던 계산기를 이내 내려놓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알고 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의 비결은 당장의 행복을 미루지 않는 데 있다는 걸 말이다. 그녀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녀는 알까. 내가 지금껏 그녀를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