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처음 받은 지극한 마음이라면, 각인된 오리처럼 계속 붙잡고 매달리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라는 신경숙 소설 속 문장을 아무리 되뇌어도 지독히 아팠다.
휘적휘적 일을 다니면서도 가슴에 시퍼런 칼이 꽂힌 것처럼 쓰라렸다. 불을 끄고 누웠다가 켜면 한 시,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두 시, 몇 번을 깨도 밖이 어두웠다. 꿈에서도 슬픔이 넘쳐흘러 베개가 다 젖었다. 간신히일어나 냉장고로 가면 문을 열 힘도 없이 자꾸만 무릎이 꺾였다.
한 달 만에 무려 8킬로가 빠졌다. 스몰 사이즈 스커트를 고르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예상치 못한 좋은 일에웃음이 나왔다. 구겨 버려진 종잇장 같던 마음이 펴지고,한 줄기 기쁨이 내리쬐었다. 실낱같이가느다란 즐거움은 어느새 한 뭉치의 희망이 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날씬한 사람’으로 살아갈 기회를 얻다니! 쇼윈도에 비친 옷태를 보고 조커처럼 웃었다. 전기충격 같던 이별도, 돌이켜보니 선물이었다. 없던 깡이 생겨 다시 고시공부에 제대로 뛰어들었고, 후회는 없다. 어떤 경험이든새로운문은 열렸다.
뒤늦게 야간대학에 진학하고, 낮에는 학교 시설관리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짬날 때마다 공부를 했고, 첫 학기에 'ALL A+'를 맞았다. 처음 보는 선배들도 '네가 과톱이구나.'하고 아는 체했다. 다음 학기에 성적이 나왔는데, 한 과목을 제외하고 A+였다. 이대로면 장학금을 놓치겠다 싶어,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교수님, 이의제기 하는 건 절대 아니구요. 제가 특히 교수님 과목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혹시 가능하시다면, 과제를 한 번만 다시 검토해 주실 수 있나요?"
처음 교수님은 성적을 고쳐 준 역사가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셨다. 포기하고 있는데, 며칠 후 전화가 왔다.
"내가 학생 레포트를 다시 찾아 봤어요. 자기만의 생각과 경험으로 풀어내서 참 좋았어요. 그 정도 정성이면 A+를 줘도 괜찮겠다 싶어서 올려주기로 했어요."
그때의 짜릿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옛 성인의 지혜를 뼛 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 또한 현 시대의 성인이신 교수님 덕분에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검정고시를 주력으로 하는 평생교육원에 있을 때 국회의원이 방문했다. 그 원 출신으로 개천에서 용 난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회의실에 앉은 우리를 죽 둘러보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교장선생님, 저 선생님 눈빛이 남다르시네요. 또렷하게 빛나네요. 꼭 잡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수원의 직업학교로 이직을 했다. 내 근무 시간의 절반정도 일하면서 몇 배를 받는 훈련교사들을 보고충격을 받았다.'어라? 이런 직업이 있었어?' 반항심 가득한 청년들도 고급지식과 말발로 무장한 교사 앞에만 가면 절로 고개를 숙였다.
주말에 펜션에 가서 고기와 맥주를 흡입하며 ‘너는 미래가 걱정되지도 않느냐’는 친구에게 무심히 말했다.
“솔직히 나는 걱정 안 해. 뭘 해도 잘할 자신이 있거든.”
결국 방법을 찾아 훈련교사가 되었다.
기억을 헤집어서 이런 일들을 글로 쓴다. 그리고 어제는 예전 문자를 뒤져 조금이라도 칭찬의 뉘앙스가 있는 건 일일이 캡처해 두었다.우울한 일 천지일 때 꺼내먹는 초콜릿 상자가 될 것이다.밖으로 나가 내 상자를 채워 줄 사람을 만나야겠다.
어릴 적 만화방 도장 깨기를 했고, 커서는 '미생'같은 작품으로 인생을 배웠다. 천계영 만화 '퍼스널컬러'에서는 주인공이 펑퍼짐한 검은색 옷만 입는 후배에게 옷 사러 가자고 하자 후배가 말한다.
"괜찮아요. 살 빼면 예쁘게 입을 거예요."
몇 년이 지나도 같은 말을 하는 후배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잘 들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야. 살쪘다고 계속 안 예쁠래. 아님 살쪄도 예쁠래?"
살이 갑자기 빠지진 않을 테니, 곱게 화장을 하고 새 옷을 입고 베이커리 카페에 가서 소금빵을 먹고 분위기 깡패처럼 폼 잡고 어플로 셀카를 찍었다.
나에게 감동하고 내가 좋아 웃음이 나고, 남에게는 덤덤해야 한다. 희망이 멀리 있어도 독수리의 눈으로 캐치해야 한다. 지루함에파묻히고 의욕을 잃어갈 때일수록 자기애가 필요하다. 사랑의 대상이 나인 '나르시시즘'만 있다면언제나 새로운 문은 열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