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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선배는 건축에 열의가 있었고, 재능도 있었고, 교수님의 인정도 받고 있었다. 다수의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인지도를 높이고 있었다. 부러웠다. 선배를 졸졸 따라다니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내심 기대했지만 약간의 팁을 얻었을 뿐, 미미의 실력이 출중하게 나아지거나 없던 재능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내가 소개해 주기는 했지만, 미미야 일과 건축을 병행하는 건 쉬운 게 아니야. 나중을 생각해서 지금 공부와 작업에 몰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난 네가 건축과에 입학하려고 했을 때, 그 마음처럼 조금 더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면 좋겠어.”
“나도 선배처럼 돈 걱정 안 하고 공부하고 싶다고요. 하지만 돈이 있어야 밥을 먹고 재료비를 충당하죠. 공부할 게 산더미라 책도 사야 하는데 그 돈은 다 어디서 나냐고요.”
“네 밥은 내가 거의 다 사주는 거 아니었냐?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몰래 혼자 사 먹지 말고.”
수업을 듣고 조교 일을 하고 공부하거나 밤새 작업을 하면 벌써 다음 날이었다. 건축은 공학이 포함되어 있지만 예술의 일부다. 설계는 디자인이고, 구조와 역학은 공학이다. 대학 수학도 배웠는데 그보다는 디테일한 설계에 관심이 더 많이 생겼다. 공부를 하고 또 해도 해야 할 공부는 더 많아졌다. 직접 구상하고 설계 도면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 보는 시간이 즐거웠다. 눈에 띄게 재능이 있는 동기나 선배도 있었고 그냥 대학 졸업장만을 바라며 강의를 듣는 동기들도 많았다. 미미는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노력하는 편이었고 선배의 충고를 받아들여 미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선배들을 도와 작업 시다를 했고 대학원생 선배들의 자료도 찾아주며 조금씩 견문을 넓혔다. 재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모르겠다.
더 많은 친구들과 선배들이 해외로 나갔던 2학년 여름방학의 어느 날, 순이의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 미미가 한 번 더 끼게 되었고 캐나다에 있는 그 친구를 또다시 만났다. 작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그녀는 더욱 여유로워 보였다. 막연히 상상 속에 존재하는 유학 중인 대학생 티가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했다. 그녀의 이름은 제니였다. 한국 이름은 이제니, 영어 이름은 제니리. 그 사이에 대학생이 된 제니는 첫해에는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지금은 기숙사를 나와서 한 아파트의 룸을 구해 이사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방 세 개에 거실 하나짜리 아파트인데 방세가 너무 비싸서 거실도 방으로 치고 4명이 공용공간을 두고 함께 쓰며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그런 생활을 하는구나. 왠지 신기하고 부럽기도 했다. 나는 쉴 틈 없이 뼈 빠지게 일하고 공부하며 여행은 생각지도 못하는데, 부유한 부모 덕분에 그렇게 살 수 있는 거겠지, 하는 심통 부리는 마음이 미미에게 솟아났다. 그런데 불쑥, 제니가 말했다.
“이제는 나 혼자 쓰는 방이 생겼으니까 순이랑 같이 꼭 한번 놀러 와! 꼭 이야!”
미미는 제니의 친한 친구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작년과 올여름에 순이 친구들 무리에 껴서 만나게 된 한 명에 불과한데 손까지 잡으면서 말해주다니. 정식으로 초대를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순이도 순식간에 우리 꼭 가자, 언제 갈까?, 하며 부추겼다. 순이의 마음은 진심일까. 내가 해외에 갈 수 있을까, 가도 괜찮은 걸까, 에이 모르겠다, 가자! 언제 또 가보겠어, 미미는 마음을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