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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제니야, 너 안 되겠다. 캐나다 가라. 미국은 네가 버티기 좀 힘들 것 같고, 캐나다는 적당할 것 같아. 미국은 가디언이 있어도 부모가 동반하지 않으면 제약도 많아서 신경 쓸 일이 늘어나기도 하고. 캐나다에서 대학 나오면 국내에서도 나쁘지 않을 거야. 캐나다에 자리 잡으면 더 좋겠어.”
제니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는 법이 없다. 가끔은 냉철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게 매정한 사람은 아니고 이성적인 판단에 감성을 우선시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엄마의 판단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지만 제니는 위로를 먼저 받고 싶었다. 수시에 실패하고 수능까지 평소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으니 제일 당황스러운 사람도 가장 속상한 사람도 제니였다. 수시로 대학에 붙어 수능은 기본 점수만 받아도 합격인 애들이 절반이고 나머지는 어느 정도 점수가 나온 듯한 표정이어서 친구들에게 자신이 망했다는 얘기까지 깊게 하지는 않았다. 엄마를 이길 자신은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의사 표현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제니는 말을 꺼냈다. 작은 목소리였다.
“엄마, 나 꼭 가야 해?”
“그럼 재수할 거야? 아니면 지방 대학이라도 갈래? 재수도 지방 대학도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 엄마는 네가 할 수 있는 거, 너에게 더 좋은 걸 해 주고 싶어. 너를 위해서, 좋은 쪽으로. 아마, 아빠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네가 싫다고 해도 아빠는 너를 미국으로 보내버리겠지. 엄마니까 너 생각해서 캐나다로 가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거야.”
엄마는 언제나처럼 이성적이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차분하게 맞는 말을 하고 있다. 제니는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 캐나다 갈게.”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큰 말썽은 피우지 않았고 무난히 학교 생활을 했다. 집에 오면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과외 선생님 말씀을 충실히 따랐다. 숙제도 웬만해서는 밀리지 않고 해냈다. 선생님들은 제니의 눈치를 봤다. 자신 있는 척, 당당한 듯 행동하며 제니를 가르치려 했지만 제니도 눈에 보였다. 그들은 제니를 잘 이끌어 주려는 게 아니라 한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제니를 이용했다. 유능한 과외 선생님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하며 비싼 선생님을 고용한 걸 알고 있어서 차마 그만둔다는 얘기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과외 선생님의 말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들은 비싼 과외비를 받고 제값을 해내지 못했다. 제니를 밀어붙여서 더 많이 공부시켰어야 했다. 수능이 끝나고 보름이 채 지나지 않아 제니의 캐나다행이 정해졌다. 홈스테이와 학교까지도.
제니는 어려서부터 방학마다 외국으로 여행을 다녔고, 일 년에 한두 달씩은 어학연수나 캠프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가까운 필리핀부터 멀게는 미국까지 다양한 나라에서 머물며 영어를 배웠다. 수업 이외에 자연에서 몸으로 하는 운동 시간이 많았던 뉴질랜드가 제니는 좋았다. 어른이 되면 순박해 보이던 키위들의 이웃으로 그들과 어울려 살면서 뉴질랜드의 자연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 엄마에게 이 얘기를 했을 때, 제니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이왕 살 거면 낙농업이 발달한 뉴질랜드보다는 호주가 더 좋을 거야. 뉴질랜드와 호주가 바로 옆이기는 하지만 호주가 더 발달했고, 직업을 구하기에도 더 나을 거고. 뉴질랜드는 나이가 많이 들고 할머니가 되었을 때 그때 살면 더 좋을지도 몰라. 자연에서 살아가는 거니까. 어리고 젊은 사람이 뉴질랜드같이 자연에 둘러싸여 있으면 그건 낭비야. 잠재적인 인적 자원 낭비.”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니는 질려버렸다. 성인이 되고 더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어서도 아예 뉴질랜드에서도 호주에서도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남반구 전체가 싫어지려 해서 남반구에는 어떤 나라가 있는지 찾아보았는데 그간 조금 궁금했던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가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무엇보다 펭귄이 사는 남극이 있어서 남반구 전체를 미워하는 건 포기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