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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는 친구들에 비해서 한 살이 많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식구들 외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순이는 이 얘기를 극도로 피하고 있고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 않아 한다.
순이에게 미국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순이는 엄마를 닮아 활발했고, 아버지를 닮아 끈기가 있었다. 순이의 자의에 의해서 하게 된 유학 생활은 아니었다. 엄마가 보냈다. 순이는 혼자 먼 나라로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게 두려웠고 한국에서 부모님과 친구들과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미국 시민권이 있고 중고등학교 혜택을 받을 수 있을 때 경험해 보고 그 뒤는 네가 선택하면 된다는 엄마의 말을 듣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마음이 크게 동하지도 않았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새해와 구정을 한국에서 보낸 후 미국으로 갔다. 홈스테이 가정에서 순이를 돌봐주기로 되어 있었다. 모든 건 엄마가 준비했다. 순이는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다. 2월부터 8월 초까지는 어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공부하고, 가을 신학기에 입학하는 일정이었다. 현지인 가정으로 가는 게 순이의 어학에 더 도움이 되는 건 분명했으나, 한 부모도 동행하지 않고 순이 혼자서 떠나는 유학이라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재미교포 가정으로 홈스테이가 정해졌다. 그 집에는 아이들이 셋이었는데 순이와 위로는 네 살 아래로는 두세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큰 언니는 따뜻했고 순이를 잘 챙겨줬다. 동생들과 나누는 대화는 순이에게 딱 적당한 수준의 영어여서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어학원은 2시면 모든 수업이 끝났다. 숙제가 있기도 했지만 한국에서처럼 오랫동안 붙들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하루가 길었다. 순이는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책장에 가득 꽂혀있는 책들을 보고 있으면 공부하고 있던 아버지의 옆모습이 떠올랐다. 책에 둘러싸여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딸이 맞나 보다 순이는 생각했다. 한국이나 한글이 그립지는 않았다. 다만 영어로 쓰인 소설을 편안하게 읽기에는 아직 실력이 부족했고 속도가 너무 느렸다. 답답한 마음에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그림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어린이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십 대에 들어서서부터는 아예 그림책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어린이용이라고 쉽게 단정 지어 버리기에는 아름다운 그림책이 많았다. 페이지마다 그림이 있고 짧은 영어가 쓰여 있어 이해하기도 좋았다. 언젠가는 그림책 작가가 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희미하게 미소 짓기도 했다.
도서관에는 아버지처럼 오뚝한 코에 안경을 쓰고 늘 같은 창가 자리에서 책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순이는 백인들의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아버지 나이 정도가 되어 보이기도 했고, 대학생 정도로 젊거나 오히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이기도 했다. 정면의 얼굴이나 걸음걸이가 아닌 책을 읽고 있는 옆모습만으로는 더욱이 알 수가 없었다. 순이는 도서관의 여러 자리에 앉아 보았다. 창가 자리에서는 밖을 내다보기 좋았고, 서가와 가까운 자리에서는 오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게 되었고, 서가 안에 있는 의자에서는 비로소 책을 조금 읽곤 했다. 소파처럼 푹신한 의자도 있었는데 여기에 앉으면 살며시 잠이 오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 사람을 보았는데 아버지와 닮아서 눈이 자꾸만 갔다. 동양인인 아버지와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도 닮아서 놀라웠다. 분명히 생긴 건 다를 터였다. 심지어 그는 하얀 피부에 회색 머리였다. 다음 날에도 그 사람은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또 그다음 날에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순이는 도서관에 가면 그를 먼저 확인했고, 그가 그 자리에 없으면 왠지 모르게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한 번도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그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오로지 앉아 있는 모습만 잠시 출석 체크를 하듯이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따뜻한 날에는 도서관 건물 밖에 있는 의자나 나무 아래에 있는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 그날 배운 문장과 상황을 떠올려 보며 살짝 입을 떼기도 했다. 소리는 햇살을 타고 공기 중으로 흐르지 않았다. 먼지 분자들과 함께 흩어져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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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
작고 차분하고 느린 목소리에 순이는 고개를 들었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던 사람이었다.
“네?”
“이거, 당신 책인가요?”
그는 다시 한번 더 작고 차분하고 느린 목소리로 순이에게 물어보았다. 그가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책은 언니가 필요하다고 빌려다 달라고 부탁한 시집이었다.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시인이었다. 그는 순이 옆에 앉으며 다정하면서도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제 아내가 좋아하던 시인이에요. 아내가 시를 많이 읽어줬었는데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이 사람은 과거시제를 쓰고 있었다.
“아, 저는 잘 몰라요. 언니한테 부탁받은 책이에요.”
“그랬군요, 실례 많았습니다.”
영어는 우리 나라말처럼 존대어가 없지만, 그가 낯설고 어린 동양인에게 존중을 표하며 말하고 있다는 걸 순이는 느낄 수 있었다. 도서관 건물 앞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던 순이는 앉은 적이 없는 듯 서서히 도서관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이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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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원에서는 두 종류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았다. 순이처럼 미국의 국공립학교에 입학하기 전, 랭귀지 코스로 수업을 듣는 학생이 있었고, 몇 개월 혹은 일 년 정도 어학만을 공부하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 학생이 있었다. 같은 아시아권 학생이어도 일본이나 홍콩에서 온 학생들은 열심히 했고 잘하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 일본 사람들은 영어 발음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그건 다 거짓말 같았다. 어학원에 있는 일본인 학생들은 발음이 좋았다. 중국에서 온 학생들이나 태국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한국에서 온 학생은 순이밖에 없었고 가끔은 그게 더 안심이고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각자에게 모국의 언어가 아닌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건 한 뼘만큼의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일이었다.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양손을 다 사용해 최대한 벌린 두 뼘만큼의 주눅이 들곤 했다. 눈이 까맣고 머리도 까만 작은 동양인 여자아이에게 친절한 미국인도 있었지만 도움의 손길을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지나가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목요일에는 수업이 한 시간 일찍 끝났다. 한 달쯤 지나 얼굴이 익고 조금 친해진 학생들은 조금은 거침없는 이들의 주도하에 목요일마다 근처 공원으로 피크닉을 나갔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국에 살면서 종종 그리워하는 풍경은 그날들의 피크닉이다. 넓은 초록의 풀밭에서 커다란 나무 아래 천 돗자리를 깔고 이방인들이 한데 모여 햇볕을 쬔다. 영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자기 나라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한다. 책을 읽고 있는 이도 있고 멍하니 누워서 하늘만 바라보는 이도 있다. 핸드폰 자판을 골똘히 누르고 있는 이도 어디에서나 흔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순이는 미국인이 아닌 각양각색의 언니, 오빠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다. 학원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영락없는 십 대의 모습이 공원에서는 보였다. 자연에서는 긴장이 풀리고 조금 더 편안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어학원 선생님이나 각자 친구가 된 현지인들이 함께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또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순이는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시집을 읽어보았다. 한국에서 시는 암기해야 하는 하나의 공부에 불과했는데 원어로 읽는 시는 노래처럼 음악으로 읽혔다. 내용이 이해되지 않아도 소리를 내어 읽기도 했고, 피크닉에서 사람들에게 차분히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읽어주기도 했다.
“Joy, most changeful of all things,
Flits away on rainbow wings;”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기쁨이라는 단어와 무지개 날개라는 단어가 마냥 좋아서 노래 부르듯 자꾸만 이 구절을 되뇌었다.
순이는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았다. 영어에도 자신이 붙어갔고 눈동자가 노랗거나 파랑인 현지인을 만나도 잠시동안 시선을 피하지 않을 만큼의 용기도 생기고 있었다.
엄마와는 매일 잠깐이라도 페이스톡을 했다. 에너지 넘치는 말투로 순이에게 말을 걸었지만 엄마는 늘 피곤한 얼굴이었다. 순이는 자신을 유학 보내기 위해 엄마가 무리해서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순이가 돈을 허투루 쓰는 건 아니었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는데 돈이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건 다 엄마의 배려에서 온 것임을 알고 있었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고 순이는 마음을 다독였다. 깊은 생각에 잠기려 할 때마다 순이는 고개를 흔들며 복잡한 생각을 떨쳐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울해지고 싶지 않았고 그럴수록 모든 걸 일단 뒤로 넘기고 가볍게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