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iara 라라 Oct 27. 2024

소개팅

*     


 카톡 프로필에 책이 여러 권 쌓여 있는 사진이 있더라고, 그래서 책을 좋아하나, 문학을 좋아하는 남자는 만나 본 적이 없는데 하면서 나갔거든. 얼굴은 그냥 평범했어. 키도 별로 크지는 않았고. 아니, 사실은 얼굴은 좀 잘생긴 편이었어. 이목구비가 막 또렷한 그런 얼굴이라기보다는 약간 눈이 옆으로 길게 큰데 다가 쌍꺼풀은 없어서 조금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런 얼굴 있잖아, 호감이 갈 수밖에 없는 남자. 앉아만 있으면 키가 더 클 것 같은데 생각보다는 크지 않아서 약간은 아쉬운 그런 외모의 사람이었지. 피부가 정말 좋더라. 따로 관리를 하는 느낌이었지만 초면에 그런 걸 물어볼 수는 없고 그냥 속으로 생각만 했어. 학교에서는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거든. 물론 학교에 적응하느라 사람들을 쳐다보며 다닐 시간도 별로 없긴 했지만 말이야. 너네 학교 식당은 어때? 고등학교 때 급식만 먹다가 내가 메뉴를 선택할 수도 있고 학교 앞에 나가서 사 먹을 수도 있으니까 너무 좋은 거 있지. 우리 학교 식당에는 일 층에서는 급식처럼 정해져 있는 한식이 매일 다르게 나오고, 이층에서는 라면이랑 떡볶이 같은 분식 메뉴랑 금액이 조금 더 비싼 특식 메뉴가 있어. 보통 교수님이나 직원들은 이층에서 특식 메뉴를 먹는 것 같더라. 분식이랑 특식 받는 곳이 나뉘어 있는데 자리도 파티션으로 약간 구분이 되어 있어. 학생들은 특식을 먹어도 파티션 안으로는 잘 들어가지 않아. 아무래도 불편한 거지. 젊은 선생님들도 많지만 그냥 딱 봐도 학생이 아니라는 게 티가 나니까 분식 먹는 자리에서 먹어. 라면이 제일 저렴해서 돈이 부족하다며 매일 라면만 먹는 학생들도 봤어. 특히 남자들은 라면에 밥 두 공기씩 추가로 후룩 말아먹고서 바로 나가. 뭐가 그리 바쁜 걸까. 친구 말로는 그런 학생들은 대부분 공대생이래. 남자든 여자든 얼굴이 까칠하고 피곤해 보여서 내가 왠지 미안해지기도 하는 거 있지. 나는 아직도 분위기를 보면서 밥을 먹고 있어. 나가자고 하면 나가고, 특식 먹자고 하면 먹고, 분식이 당긴다고 하면 종류별로 하나씩 고르고 남은 걸 내가 사고. 학교 앞에 식당도 카페도 많아서 이것저것 먹어봤는데 아무리 저렴하다고 해도 밖에서 먹으면 돈이 많이 들어서 마음이 그렇게 편하지는 않아.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까 봐. 미미 네가 아르바이트 잘 아니까 나 좀 인도해 줘라. 너처럼 학교에서 조교를 하면 좋을 텐데, 여긴 조교 뽑는 공고를 본 적이 없어. 스터디 공지는 많이 올라오더라. 돈을 벌지 못하면 공부라도 열심히 해야겠지? 머리 좋은 애들이 너무 많아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확실히 고등학교랑은 다른 게 그런대서 보이는 것 같아. 엄청 넓은 강의실에 다른 과 학생들도 있고, 발표 한번 하면 확실히 실력이 보인다니까. 기죽는 건 아닌데 그냥 어디서 이렇게 많은 똑똑한 학생들이 나왔을까 궁금하기는 해. 우물 안 개구리 같았구나 싶기도 하고. 한껏 꾸미고 다니는 애들도 많고 완전히 너처럼 털털하게 다니는 애들도 있고, 특이하게 하고 다니는 애들도 있어. 지나다가 우연히 버스킹 공연을 몇 번 봤는데 다들 실력이 엄청나더라. 팬들도 벌써 있어서 응원도 만만치 않았어. 영상 찍는 사람도 많았고, 현수막도 있더라니까. 난 그런 거에 별로 관심 없다고 생각했는데 잘 몰라서 그랬나 봐. 또 가고 싶고 머물고 싶고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자유로운 기분이었달까. 거기 있던 남자들은 대부분 멋지긴 하더라. 후훗. 아 맞다, 나 소개팅 얘기하고 있었지? 아무튼 처음 만나는 거니까 분명히 어색할 거잖아. 카페에서 만나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사이가 기니까 말을 너무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서 바로 밥 먹으러 가자고 했지. 소개팅 첫 식사로 아주 무난하게 파스타를 먹으러 갔어. 나는 늘 그렇듯이 크림소스 파스타를 시켰는데 그 사람은 토마토소스가 베이스 된 파스타를 시키더라. 수프와 샐러드가 있었고 식전 빵도 나왔어. 발사믹 소스에 찍어 먹는데 그 사람도 자주 먹어 봤는지 전혀 어색함이 없더라고. 한두 개씩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고 식사를 하고 맛이 어떻다는 얘기를 하고 그렇게 적당한 간격으로 대화를 이어나갔지. 내가 앞을 쳐다볼 때마다 그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지 않았어. 부담스러우면서도 관심받는 처음 느껴본 그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내가 뭐 언제 남자를 만나 본 적이 있어야지 말이야. 식사 후에는 카페로 가서 커피도 한잔했어. 카페인에 약하다며 그 사람은 아이스 초코를 시켰는데 좀 깨더라. 커피 잘 못 마실 수는 있는데 소개팅에서 아이스 초코는 좀 그렇지 않아? 디카페인을 시킬 수도 있고, 티나 아무튼 다른 음료를 시킬 수도 있잖아. 초강도 호감형 미소를 지으면서, 단 거 좋아하시나 봐요, 그렇게 말했지 뭐. 이 카페 초코는 많이 달지 않고 진해서 좋대. 이 사람은 카페도 많이 다니나 보네, 했어. 식사는 그 사람이 내고 카페는 내가 계산했어, 잘했지? 그 사람이 자꾸 질문을 했어. 그리고 헤어져서 집에 가는데 잘 도착했냐는 톡과 함께 다음 주에 언제 시간이 괜찮냐고 물어보더라고. 누구든지 일단 마음에 들지 않아도 세 번은 만나 보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 근데 나 그 사람이 좀 마음에 들었거든. 그래서 고민 없이 다시 만나게 된 거야. 궁을 산책하거나 미술관을 가거나 서점을 둘러보고 싶었는데 두 번째 만남이니까 꾹 참았지. 평범한 데이트를 하려고. 그럼 영화를 볼까 했는데 영화가 마땅하지 않았어. 드라마 장르의 로맨스 영화가 보고 싶은 게 없더라고. 그렇다고 로봇만 잔뜩 나오는 영화나 사회 부조리가 심한 영화를 보기에도, 애니메니션을 보기에도 아직은 어색한 느낌이라서. 나 너무 눈치를 봤나 봐. 그냥 내가 보고 싶었던 거 보면 되는데 말이야. 아무튼 그래서 영화도 못 보고 일단 조금 걸을 수 있는 대학로에서 만나기로 했어. 대학로 연극은 왜 생각하지 못했나 몰라. 소극장 연극을 봐도 좋았을 텐데 말이야, 안 그래? 우리 나중에 연극 한번 보러 가자. 생각보다 금액도 별로 비싸지 않고 소극장이어서 생동감이 있거든. 우리나라에서 만든 뮤지컬도 좋겠다. 뮤지컬은 큰 공연장에서 하는 비싼 공연만 생각했는데 대학로에도 소규모로 좋은 뮤지컬이 많다고 하더라고. 알아야지 경험할 수 있는 게 세상에는 너무 많은 거 있지. 그래서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느냐가 나의 경험 반경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별다른 욕심 없이 살아왔는데 조금 더 넓어지고 싶기도 하고, 그런 마음이 드는 게 귀찮기도 하고. 나 요즘 이상해. 봄, 딱 날씨 좋을 때였거든 그때가. 음료를 하나씩 들고 천천히 마로니에 공원을 걸었어. 나는 똑같이 아아를 마셨는데 그 사람은 이번에 그린티 라테를 마셨어. 아이스 아니고 핫으로. 그린티 라테는 핫으로 마셔야 향이 풍부하고 우유가 부드럽다나 뭐라나. 당신 말투가 부드럽습니다,라고 말하지는 못했지. 적당한 곳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대화가 드믄드믄 끊겨도 불편하지 않아서 신기했어. 조급해서 내가 말을 계속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맘이 들지 않더라고. 지금 말하다 보니 보통 너랑 있을 때랑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했네. 그 사람이 갑자기 뭔가를 쑥 건네더라. 시집이었어. 제목은 <다정한 호칭> (문학동네, 2012). 이은규 시인이라고 처음 들어봤다. 누군가한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엄청 소리 지르며 그게 뭐냐고 닭살 돋는다고 팔을 문질러 댔을 것 같은데 막상 내가 이런 경험을 하니까 왠지 좋더라. 시집이라니, 좀 멋있는 거야. 자기가 좋아하는 시집이래. 내 생각이 나서 선물 주고 싶었다고 하더라고. 우린 소설을 좋아하지 교과서에 있던 시 말고는 시를 읽지는 않았잖아. 근데 나, 옛날에 시를 읽은 적이 있었어. 중학생 때였는데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이라고,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서 조금 당황스러웠어. 난 시는 잘 모르지만 제목이 마음에 드네요, 고마워요, 그렇게 얘기했지. 이 사람이 나를 정말 마음에 들어 하는구나, 이런 생각도 하면서. 지금 얘기하면서 깨닫고 있는데 나 겨우 대학교 1학년인데 굉장히 올드한 데이트를 한 것 같아. 데이트는 맞았겠지? 깔끔하게 퓨전 일식 같은 걸 먹었어. 해가 좀 길어져서 밥을 먹고 나왔어도 아직 많이 어둡지는 않더라. 거리 공연을 하고 있어서 그걸 잠시 바라봤어. 나란히 서서. 잔잔한 하루였다고 생각해.  


 잘 들어갔냐고는 묻지 않았어. 긴 톡이 왔는데, 나를 알게 되어서 좋대. 종종 연락하고 지내자며 말하더니 그걸로 끝. 그렇게 그 사람 혼자 마무리를 짓고 나는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나 버렸어. 그다음부터는 연락이 없더라고. 나 남자 친구 생기는 줄 알았다? 웃기지! 근데 너무 시시해. 시시해서 시들어 말라비틀어져 버렸어. 기분은 별로 나쁘지 않아. 요즘 시를 다시 읽고 있어. 계속 말라 있기는 한데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뭐 그래 요즘.     


 무지개 날개. RAINBOW WINGS.    


*     


 순이는 이런 상황을 그냥 받아들인다. 자주,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     


 미미와 통화를 하면서 순이는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순이 약속 장소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그간 쌓인 말들을 조곤조곤하게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훌쩍 지났던지 일찍 도착한 한 친구가 순이에게 전화를 해서 그 카페로 들어왔다. 미미도 얼굴은 알고 있는 친구였다. 한 명 두 명 인원이 늘어나더니 미미가 빠져나갈 새도 없이 순이 친구들이 모두 다 모이고 말았다. 동창회라도 하듯 복작거렸고 다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어색했지만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미미도 이들 틈에 껴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한 친구는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있고 방학이라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고 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캐나다에 가니, 입학 시기도 맞지 않았고 어학도 부족하여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3 과정을 지금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졸업하면 9월에 지금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와 연결된 대학으로 바로 입학을 한다고도 했다. 미미는 처음으로 새로운 세상의 사람을 만났다. 외국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해서 그렇게 유학하고 있는 친구의 이야기는 낯설었지만 미미의 호기심을 자아 내기에 충분했다. 그 친구는 성격이 좋았다. 그래서 외국에서의 생활도 적응을 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지금은 홈스테이를 하고 있어서 손님을 초대하기가 불편하지만 나중에 대학에 가면 놀러 오라는 피상적인 말도 해 주었다. 그 말이 종종 미미에게 떠올랐다.

이전 03화 여름방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