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iara 라라 Oct 27. 2024

그녀

+     


[지혜 제이]     


 이제 막 대학에서 일 년을 보낸 학생이 마스터 룸에 들어왔다. 마스터 룸에는 개별 화장실이 딸려있고 방도 넓은 편이어서 보통은 두 명 이서 함께 사용하곤 했는데 아직은 어려 보이는 새초롬한 표정의 그녀가 그 방을 혼자서 쓰고 싶다고 했다. 금액이 올라갈 텐데도 괜찮다고 했다. 특별히 언급해야 할 필요는 없었는데도 그녀는 전에 홈스테이와 기숙사에서 생활했으며, 처음으로 방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안전과 신용이 보장된 집에서 살고 싶다고 작은 소리였지만 당당하게 얘기했다. 방이 마음에 들었고 지혜가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고도 했다. 밴쿠버에 살면서 현지인들보다 한국 사람들이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지혜는 처음 만나지만 왠지 모르게 한국에 있는 친구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 솔직한 모습으로 강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그녀를 보며 지혜는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고 등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주의 사항을 세세히 설명해 주고 다짐을 받은 후 다른 방에 거주하고 있는 학생들도 소개해 주었다. 거실이 지혜의 방인 걸 알고 그녀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리긴 했지만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곧 이사를 들어왔다. 그리고 한여름이 되기 전에 그녀는 여름방학을 보내러 한국으로 들어갔다. 이사 후 두 달 동안 방을 비웠던 그녀는 한층 생기 있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을이 보내며 돌아오는 짧은 겨울방학 동안 2주 정도 한국에서 친구들이 방문할 예정인데 그녀의 방에서 같이 지내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진욱과 오로라 여행을 계획하고 있을 때였다. 지혜는 불쑥 자기는 그 시기에 여행을 떠나 있을 테니 룸메이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친구들을 거실에서 재우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거실이 불편하면 그녀가 거실을 쓰고 그 친구들은 그녀의 넓은 방을 쓰면 될 터였다. 외부인이 자고 가는 경우가 거의 없던 집에 손님을 들일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지혜의 방인 거실을 사용하는 게 좋겠다는 말까지 하다니 지혜는 자신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 뒤로도 한동안 궁금해하곤 했다.     




 지혜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그녀의 친구들이 집에 들어왔다. 지혜를 보며 두 친구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중 한 명이 지혜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방을 보러 왔을 때 말했던 친구가 이 친구라는 걸 지혜는 알 수 있었다. 생김새도 분위기도 키도 전부 다 달랐는데도 지혜는 알 수 있었다. 한 명의 이름은 순이였고, 다른 한 명의 이름은 미미였다. 둘 다 이름이 참 신기하네, 생각했다. 순이는 지혜의 어떤 모습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마음속 깊숙이 품고 있었던 거라고 나중 에서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이유 없이 지혜는 순이가 좋아졌다. 순이는 그녀가 학교에 가서 집을 비워도 지혜와 곧잘 대화를 나누었고, 다른 룸메이트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유창함을 드러내며 과시하지는 않았는데도 영어 사용에 편안함이 느껴졌다. 조곤조곤하게 자주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깊이 있는 내용을 말하지는 않지만 가볍게 나른한 대화가 이어지게 하는 말투였다. 어느 정도는 선이 있었고 룸메이트와 함께 외출하거나 외식을 나가는 데 가리는 건 없었다. 순이와 다르게 미미는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를 원해 보였다. 이 둘은 지혜가 보기에 각자 따로 있지만 함께 있는 듯 가까운 사이로 느껴졌다.     




 진욱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날 수 있다고 기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예전처럼 친구들과 시애틀에서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보내자고 말했다. 지혜는 전에 함께 어울린 적이 있는 제니와 한국에서 온 제니의 친구 두 명도 함께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진욱이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지혜가 순이에게 시애틀에 가자는 얘기를 꺼냈을 때, 놀랍게도 순이는 당황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였다. 재미있고 흥미로워하며 웃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곧바로 싱긋 웃으며 미미, 제니와 상의해 보겠다고 고맙다고 말을 했지만 지혜는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아래는 걱정의 눈동자가 있었다. 지혜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순이를 계속 설득했다. 마침내 결심이 선 순이가 미미를 설득했다. 제니는 자신은 관계없다는 듯이 프로젝트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에는 다 끝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지닌 채.


+     


[미미]     


 무료하던 차에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신남이 끼어들어 시애틀이 정말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한국행 비행기 티켓의 날짜를 변경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수수료가 들 것이고 저렴한 루트로 티켓을 구입했던 만큼 수수료가 비쌀 수도 있어서 걱정이었다. 또 예상보다 오래 체류하게 될 경우에 가지고 있는 돈이 부족할 텐데 하는 염려가 있었다. 현실적인 돈 문제가 아무래도 가장 컸다. 비행기 티켓은 지혜가 알아봐 주었다. 수수료가 들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비행기 티켓이 해결되고 두 번째로는 비자 문제가 있었다. 시애틀은 미국이므로 밴쿠버에서 한국 여권만으로는 미국에 입국할 수 없다고 했다. 다행히 ESTA라고, 전자 여행 허가라고 하던데 그걸 취득하면 비자가 면제된다고 했다. 앱으로 신청하면 빠르면 하루 만에 늦어도 72시간 안에는 발급이 가능하다고 했다. 2년 유효하고 90일 체류가 가능한데 당연히 21달러 정도의 발급 비용이 따로 있었다. 2인 이상은 그룹으로 신청할 수 있어 미미는 순이와 제니와 셋이 함께 신청하면 되겠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순이는 미국 비자가 있다고 했다. 어렸을 적에 미국에 다녀온 적이 있어서 그때 발급받은 비자가 아직 유효하다고 했다. 미국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해서 미미는 놀라기도 했고 약간 의아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조잘조잘 미미에게 다 하던 순이였는데 미국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였다. 지혜는 잘 됐다며 얼렁뚱땅 넘어갔다. 시애틀에 가면 지혜 남자 친구가 친구들과 이층 집을 셰어 하며 살고 있는데 함께 지내는 친구들이 있기는 하지만 2층에 비어 있는 방이 있어서 거기서 지내면 된다고 숙소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돌아다닐 때도 남자 친구 차로 다니면 되니까 차비도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식비가 좀 들기는 하겠지만 초대하는 만큼 지혜와 남자 친구의 손님이니 되도록 비용이 들지 않도록 저렴하고 맛있는 시애틀 식당에 가거나 현지식으로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입장료가 없는 좋은 곳이 시애틀에는 많다고 말하기도 했다.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자는 지혜의 말에, 왜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하는지 미미는 의문이 생겼지만 순이는 의심 하나 없이 좋아하는 표정이었고 그저 감사하는 마음을 표했다.     


+     


“딸, 오늘은 뭐 했어? 색다른 것 좀 먹어봤어?”

“엄마, 나 시애틀 가려고.”

“뭐, 시애틀? 시애틀이 캐나다에 있었나?”

“아니, 시애틀은 미국이야. 근데 캐나다 바로 옆에 있대. 밴쿠버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대. 국경이 접해 있어서 길이 연결되어 있나 봐. 여기 사는 한 친구가, 그 거실에 산다는 친구 있잖아, 그 친구가 시애틀에서 유학 온 건데, 시애틀에 사는 사촌 언니가 크리스마스랑 새해까지 같이 보내자고 우리를 모두 초대했어. 그래서 이왕 캐나다까지 멀리 온 거 미국도 가고 거기서 더 지내다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사촌 언니네 집이 이층 집이어서 이층에 있는 방을 우리가 쓰면 된대.”

“어 그래, 잘 됐다. 그 사촌 언니 정말 고맙네.”     


 시애틀에 가게 되었다는 말에 엄마는 놀라면서도 미미보다 더 신나 했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실컷 놀다가 오라는 말도 했다. 시애틀에는 지혜의 남자 친구가 아니라 사촌 언니가 사는 걸로 했다. 부모님이 함께 사는 것도 아닌데 남자 친구네 집에서 머문다는 건 왠지 한국 정서에 맞지 않다고 미미는 제멋대로 판단하고 그렇게 엄마에게 말했다. 낯선 곳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초대를 받아 가는 걸 왠지 걱정하시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것도 다 미미 혼자의 생각이었다. 엄마는 생각보다 깨어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며칠 뒤에 엄마는 시애틀에 바늘처럼 생긴 타워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꼭 올라가 보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미미 엄마는 그렇게 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위아래 아들들 사이에 끼어서 말없이 버둥거리기만 하는 딸을 종종 감싸주곤 했다. 미미의 대학교 첫 학기 등록금을 아빠에게서 사수해 준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을 거다. 이번 여행을 응원해 준 것도 미미는 고마웠다. 여행 며칠 전에 엄마는 캐나다에서 친구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니 밥 한 끼라도 꼭 네가 대접하라면서 봉투 하나를 손에 쥐어 주었다. 만 원짜리 열 장이 봉투 안에 들어 있었다. 재미있게 잘 다녀와,라는 메모와 함께. 미미는 돈과 메모가 들어 있는 봉투를 엄마에게 받은 그대로 캐나다에 가지고 왔다. 엄마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어쩌면 시애틀에 가서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15화 유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