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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 Dec 31. 2021

그때 그 막걸리

천사 날개를 만들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면 주일학교 교사였던 나는 몸값이 올라갔다. 유치부 담당이라는 이유로 성탄 밤 미사에 등장하는 천사 복장 준비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천사 날개는 하드 보드지를 날개 모양으로 자르고 그 위에 얇은 습자지를 여러 겹으로 부치고 칼집을 내어 쓸어 올려 만들었다. 손가락을 야무지게 오므려  습자지에 마찰을 일으키면 제법 깃털 모양이 됐다. 그 날개를 하얀 원피스를 입은 유치부 아이 몇 명에게 입혀 입장시키면 내 크리스마스 준비는 끝나는 셈이었다.


크리스마스 전야에, 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안치하는 것은 그날 전례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었다. 성당의 모든 불이 소등되면 조용한 멜로디의 성탄 성가에 맞춰 아기 예수님을 안은 사제가 앞장서고 촛불을 든 천사들이 뒤 따라 입장하게 된다. 이제 겨우 여섯, 일곱 살인 유치부 아이들은 엄숙히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지루해 몸을 이리저리 꼬았다. 그런 아이들에게 입장하기 전 초에 불을 붙여주는 것은 아주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드디어 차분하게 올갠 반주가 시작되었다. 촛불을 든 천사 복장 아이들이 사제의 뒤를 따라가는데 어디선가 작은 불꽃이 후두득 일었다. 입장하면서 앞 뒤 간격을 조종하지 못하고 좁아진 두 아이 중 뒤 아이의 촛불에서 앞 아이의 천사 날개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

성가대의 성탄 성가는 맑고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데 나는 순식간에 고요와 거룩함을  잃고 혼자 혼비백산했다. 급하게 달려가 날개 불은 껐지만 한쪽 날개는 순식간에 촛불에 타 흑조의 날개가 됐다. 흑조 날개로 입장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뒤에 남겨진 아이는 울상이 됐고 나는 그 아이를 달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행렬을 지켜봐야 했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엔 애타는 분주함과 혼비백산이 있었다. 어찌 크리스마스 전례가 한 사람의 혼비백산만 있었겠냐마는 나에게 크리스마스를 기억하라면 너무나 강력한 그날의 기억을 따라갈 다른 기억이 없다. 20대의 7년간을 주일학교 교사로 보내며 매 일요일을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던 내게 크리스마스는 할 일이 너무 많은 날이기도 했다.


그렇게 혼비백산 성탄 전야 미사가 끝나면 주일학교 교사들은 막걸리 집으로 갔다. 그때는 언제나 막걸리가 정답이었다. 막걸리 한 잔을 쭉 들이켜면 모든 긴장이 풀렸다. 두부 한 모에 막걸리 몇 병이면 10명 가까운 주일학교 교사인 우리들에겐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평상시엔 두부 한 모를 안주로 했을 술자리가 그날은 파전까지 곁들여 나름 크리스마스 뒤풀이가 됐다. 그렇게 막걸리를 마셔야 크리스마스가 끝났다.


대부분 학생이었던 주일학교 교사들은 늘 주머니가 가벼웠다. 그래도 만나기만 하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교사 회합이 끝나면 막걸릿집이 참새 방앗간이었고 한인전(한양대와 인하대 야구경기)이 끝나면 해당 학생들이 많았던 교사들과 함께 막걸리로 후반전을 치렀다.


남편은 맥주를 좋아했다. 술을 물 삼아 먹던 대학생 아들에게  ‘속 버리니 소주 말고 맥주 먹어라’하며 시아버지가 두둑이 쥐어줬던 용돈으로 남편은 일찌감치 맥주 취향을 갖게 됐다. 남편은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막걸리를 드시자 서서히 취향을 바꾸었다. 성당을 지으면서 인부들과 점심에 막걸리를 마시며 건축비를 아꼈던 소박한 신부님의 취향이 전해진 것이다. 주일학교 때 먹어보고 잊었던 막걸리가 다시 내 앞에 등장했다. 막걸리 팬이 된 남편은 인터넷으로 고급 막걸리에도 도전했다. 대기업 총수가 마셔 유명해진 막걸리는 한 병에 10만 원을 넘기는 것도 있었고 제일 저렴한 막걸리도 만원에 가까웠다. 남편은 프로답게 막걸리를 여러 애주가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누구든 "유명 막걸리도 맛있네" 이야기를 했지만 가격에 상응하는 맛이라 극찬한 애주가는 없었다.


노동이 빠진 막걸리는 막걸리로 자격미달이다.  게다가 비싸기까지 한 막걸리도 어쩐지 막걸리 답지 않다. 민속주인 막걸리는 땀 흘리는 농사현장에서 지지 않던 새참이 아니었던가. 노동의 시간을 겪지 않은 이에게 막걸리는 그냥 수많은 술 중의 하나일 이다. 내가 20대에 마신 막걸리에는 젊음과 계산하지 않은 노동이 담겨있었다. 사제의 막걸리에도 성당을 짓는 애환과 노동이 들어 있었다.


얼마 전부터 우리 성당은 사제관 증축을 하고 있다. 사제 한 분을 더 모시게 됐기 때문이다. 성당 회장인 남편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공사 현장에 나가 살핀다. 청소를 했다며 바지에 흙을 잔뜩 묻혀 들어오기도 한다. 증축 진행이 계획보다 늦어져 애간장을 태운다. 오랜만에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들어가 애태우는 남편에게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그 막걸리에 기도를 담았다. 사제관이 잘 지어지고 새 사제가  본당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비는 기도였다.


막걸리를 쭉 들이켜 20대의 어느 한 때, 크리스마스 행사를 마치고 먹었던 막걸리 맛이 소급됐다.

"맞아, 이 맛이야. 그때 그 막걸리” 

잘 익은 총각김치 하나를 집어 우두둑 씹었다.


무릇 막걸리에는 신나는 에피소드 몇 개쯤은 들어가야 한다. 막걸리 한 병은 지금도 천 원짜리 한 장이면 된다. 천 원의 행복이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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