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운 좋게 버스 자리에 앉았다. 열심히 휴대폰에 빠져있다가 내릴 때가 되어 하차 태그를 찍었는데 아차, 이건 기후동행카드 사용이 불가한 버스였다. 하차하는 사람들 틈에 껴 가방 속에서 카드를 뒤적이다가 뒤에 오는 사람과 툭. "죄송합니다." 아뿔싸 카드를 꺼냈는데 놓쳐버렸다. 기사아저씨는 문 닫힘 버튼을 누르시는 중. 나는 한번 더 크게 "죄송합니다!" 외쳤다. 다시 문을 열어 주셨고, 냉큼 카드를 주워 태그. 폴짝. 뛰듯이 내렸다. 이어지는 출근길에 소리 내어 크게 사과한 것에 퍽 개운함을 느꼈다면 내가 이상한 건가?
실수하고, 마땅히 표현하는 것. 오랜만이란 기분이 들었다. 부딪힌 사람과의 눈인사로, 기사아저씨의 약간의 기다림으로 실수와 사과가 받아들여진 느낌이었다. 나는 언제부터 감사와 사과에 인색한 사람이 되었나. 인간은 언어로 천냥빛도 갚는다던데 왜인지 사과하면 다 내 잘못 같고, 감사하면 내가 부족한 사람 같다는 기분이 남았다.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점점 칭찬할 일도 적어지고 칭찬받을 일도 적어지는 일상 탓인 걸까. 그래서 이런 기본적인 표현마저 작게, 적게 하게 되어버린 걸까.
좀 더 어렸을 땐, 사과하지 않을 일도 사과하는 탓에 한없이 작아진 자신과 마주해야 했다. 서비스직에 있기도 했고, 힘없고 미숙한 이에겐 사과는 디폴트값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지나 점점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알게 되고, 함부로 사과하지 않는 것이 나를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면서 그 말이 필요한 일들을 벼르고 걸렀다. 그렇게 나는 그 말과 기꺼이 멀어지고자 했다.
회사분위기 상 어쩌다 실수한 일, 놓친 일이 발생하면 공공연하게 범인을 찾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나는 아니야'란 방어 카드를 품고 내밀 타이밍을 살폈다. 상황에 대한 반사적 반응일 수 있겠지만, 거기서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상황을 경계하고 함부로 모든 것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하는 의식이 피어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과와 감사가 필요한 일이란 약점이며 민폐가 될 수 있으니 내색하지 않는 상태가 안전하다고 느꼈다. 물론 사회생활에서 일정 부분 필요한 태도겠으나 오늘은 서로 기대고 이해해 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다.
사람인이라는 한자가 서로에게 기대고 있고, 분명 인간은 공동체로써 사회를 꾸리고 생활을 영위해 간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개인의 이익, 우위, 선별 등을 위해 열심히 각기 자리에서 치열하기 여념이 없다. 그래서 자꾸 잊어가나 보다. 서로의 모난 부분이 받아들여지고 포용될 수 있었던 감각을.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경험인지 모르는 관계나 사건이 더 잦아지기만 한다.
나는 실수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야 성장도, 수용력도 갖출 수 있으니까. 또한 염치를 느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과도 주고받으며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일을 그에 맞춰 넘기고 헤쳐가기 위한 단단함은 그런 곳에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미안함을 말할 수 있어 안심이고 감사함을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
글을 쓰다 보니 미안한 얼굴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얼굴들에겐 감사함 또한 곳곳에 묻어있다. 표현하면 좋겠으나 단지 말뿐인 것이 부족해 보여 서툰 마음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주머니 속에서 점점 무거워져 더는 감추기 어려워지면 그때서야 터진 주머니를 머쓱하게 보이며 얘기하게 되는 것일까. 그러지 않았으면 해서 쓴 글인지도 모르겠다. 알고 지낸 이들에게 품고 지낸 마음이라, 하루에 한 명씩이라도 표현해 보는 것을 내달 목표로 적어본다. 뜬금없어 보일 수 있어도 우리 기대어 살자고. 내가, 당신이 그로써 조금 가벼워진 어깨로 하루를 마치자고 고백해야지.
명절이 다가오며 덕담과 안녕을 묻곤 한다. 이런 사소하고도 거한 핑계로 안부를 묻고 답하는 요즘이 퍽 달갑다. 잠시 속도를 줄이며 주변을 살피는 기분이랄까. 근사한 이유 없이도 나와 주변인들을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일상에 녹아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