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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도둑

by 우보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우린 도시락을 이미 오전에 먹어버린 후 온전한 점심시간을 즐기기로 했어요. 오늘 점심 놀이 메뉴는 도둑과 경찰 놀이입니다.


우리 네 명과 몇 명의 친구들이 함께 했습니다. 경찰과 도둑 놀이를 하고 나면 온몸이 땀에 절게 마련입니다. 정신없이 도망가고 말도 안되게 실제로 때리기도 했거든요. 경찰 역할을 하는 친구들은 가짜로 도둑들을 때립니다. 그러다 흥분해서 진짜 경찰처럼 빙의가 되는 친구들이 있어요.


가짜로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진짜로 치고받고 몸을 씁니다. 어느 날엔 너무 치대어서 몸이 너무 아파서 몸살을 앓은 적도 있었습니다.


"빨리 도망가자."


"오늘 어디까지 갈 수 있지?"

"학교 전체로 숨을 수 있어. 옥상만 빼고."


"너무 넓지 않나? 경찰들이 어떻게 찾지?"

"경찰들 걱정하지 말고, 준기 넌 달리기 빠르니깐 다니면서 골려줘. 우리들은 여기저기 숨어 있을게."


"알았어." 나는 기분 좋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며 경찰들을 약 올렸습니다.


"느림보들아. 잡아봐!"

"준기 너 그러다 먼지 나게 맞는다. 경찰님들을 함부로 부르다니."


10살의 나이에 경찰은 세상의 신과 같았습니다. 절대 옳은 일을 하는 그런 존재였어요. 경찰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꼭 경찰을 해야 하는 직성이 풀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운동장 사방을 보며 열심히 뛰고 있었는데 갑자기 넘어졌습니다. 철중이가 제 발을 걸어서 넘어트렸습니다.


"하하. 멍청아."

"아... 야 발을 왜 걸어?"

"네 발이 나한테 걸린 거지. 내가 언제 걸었냐?"

"분명히 일부러 그랬잖아!"


"난 일부러 안 그랬어. 운동장이 네 거냐?"

"그게 무슨 말이야?"

"난 혼자 경찰놀이 하는 중이야. 너 도둑이니깐 내가 잡은 거라고 치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넌 우리 놀이에 안 꼈잖아."

"안 끼어도 내가 혼자 경찰놀이하니깐 도둑들을 잡을 수 있어."


철중이는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항상 놀이를 망치거나 방해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끊임이 없었지요. 오늘도 철중이의 어깃장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너 때문에 무릎이 까졌잖아."


무릎이 잔돌에 긁힌 자국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내 발도 아파. 너 때문에 부러졌을지도 몰라. 빨리 도망가시지. 이제 너 잡을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멍청아."


저는 그렇게 말하고 잽싸게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철중이의 고집은 돌 같았습니다. 이름처럼 무지막지하게 무식한 친구입니다. 당연히 달리기가 빠른 저는 철중이를 뒤로 하고 본관 으슥한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교장실이 가까워 친구들은 이 주변에선 안 뛰거든요.


'역사관으로 숨자. 철중이는 무식해서 계속 잡을 거야. 오늘 경찰과 도둑은 이걸로 땡이네.'


역사관은 보통 크기의 교실 반만 한 곳입니다. 예전에 지나가면서 청소하는 걸 슬쩍 본 적이 있습니다. 바깥쪽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창문은 흰색 종이로 가려져 있어 내부를 볼 수 없고요. 우리 학교 학생들은 이곳을 지나가기도 꺼려했고, 더더욱 이 역사관엔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문을 열어보았지만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짝 눌러서 들어볼까?'


문이 나무문으로 되어 있어 집에서 처럼 손잡이를 힘을 주어 살짝 들어 돌려보았습니다.


"딸깍"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습니다. 복도엔 적막이 흘렀고, 오직 아이들이 소리치는 소리만 운동장 쪽에서 들려왔어요.


저는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었어요. 문 틈에 귀를 대고 철중이가 혹시 오지 않을까 기울였습니다. 복도에서 철중이가 쿵쿵거리며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철중이조차 이 복도가 싫었는지 멈추지 않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어요.


'이 휴. 저 놈도 여긴 싫나 보네.'

'이왕 여기 들어온 거 한번 살펴볼까?'


역사관 안에는 여러 사진들이 걸려있었고, 앨범과 책들이 수북하게 꽂혀있었습니다. 앨범은 오랜 세월을 맞은 듯 겉표지가 갈라져있었습니다. 안쪽에 있는 책들은 끈으로 묶은 책등이 보이는 걸로 봐서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것 같았고요.


맨 왼쪽에 있는 앨범을 꺼내보았습니다.


"1917년? 진짜 오래됐네."

"이 사람들은 지금 쯤 살아 있을까?"

"얼굴은 지금 우리들이랑 비슷하네."


쓰여 있는 말은 일본어로 되어 있어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진이 정갈하게 있고, 얼굴들이 깨끗한 걸로 봐선 그때도 잘 먹고 잘 자란 아이들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앨범을 다시 넣고, 액자에 걸려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4대 교장 이시카와 츠나키치'

'5대 교장 키요시마 료사쿠'


1대부터 3대는 한국인 이름이었지만, 4대부터는 일본인 교장의 이름이 적혀있었습니다.


'이것도 우리 학교의 역사라서 보존해야 하는 건가?'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순간 오싹해졌습니다. 변소깐에서 아이들과 나누던 대화가 생각났어요.


"죽은 일본인 교장의 무덤이 변소 자리에 있었대." 그 말을 하던 준민이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역사관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철중이가 돌아다니고 있어서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했어요. 다시 앨범을 보았습니다.


저는 1944년 앨범을 골랐습니다. 1945년에 광복하기 전의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oo국민학교 1944년'

"이 때도 국민학교라고 했구나."


앨범에는 반별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있었습니다. 1917년 앨범과는 달리 모두 하얀색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한 여자아이의 얼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름은 한자로 되어 있어 알 수가 없었지만, 성은 저와 같았습니다.

‘김 金’

‘한국 사람 같은데’

‘金子花子’


김 씨 성을 가진 여자아이. 분명 한국 사람의 성씨 같았지만 네 글자로 되어 있었어요.


‘아. 한자 공부를 좀 할 걸 그랬나? 매일 선생님이 써주는 한자는 대충 넘겼더니...’

‘김 자화자?’


이름이 특이했습니다. 김 자화자라고 읽어야 할지 감이 없었어요. 한자는 잘 몰랐지만 매일 수업하면서 선생님들이 한자를 같이 써주곤 했습니다.


“한자를 알아야 우리 국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한자와 국어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오직 저 한 사람의 이름만 알 수 있었어요.


분명 일제 강점기에도 한국인들이 학교에 다니고 졸업했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李’

‘이 성은 이 씨네.’

‘朴’


몇몇 성은 한자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분명 한국인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얼굴의 모습이 한국인 같았거든요.


‘한국인이라고 해야 하는 거야. 조선인이라고 해야 하는 거야?’

‘일제 시대면 아직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기도 하고.’


나중에서야 대한국인이라고 여러 독립운동가가 이야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땐 이미 없어졌고요. 몰래 숨어들었던 역사관에서 저는 어떤 슬픔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인이지만 자신의 언어로 이름을 쓸 수 없는 존재라니요.


1944년의 학교 앨범은 많은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름이 없다.’


이름을 뺏긴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점심시간의 역사관에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생각할 수 있었어요. 앨범을 뒤적이다 맨 뒷장을 펴 보았습니다.


‘내가 나로서 기억되지 못한다는 점은 슬프다.’


정갈한 연필 글씨로 누군가 써놓았습니다. 오래된 것처럼 색은 바래졌지만,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합니다. 선생님의 글씨 같기도 했어요.


“댕. 댕.”


무미건조한 점심시간을 끝내는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역사관만큼이나 그 소리도 오래된 것 같았지요.


저는 앨범들을 다시 잘 넣어두고 교실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철중이를 마주쳐도 잡지 않을 겁니다. 종이 치면 우리의 놀이도 끝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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