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끝날 것 같던 슈퍼 마리오도 윤기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끝났습니다. 너무 빨리 달리다가 구덩이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 버린 겁니다.
"속도를 줄여야지. 거기서 그렇게 가면 어떡해?"
"네가 해보던가!"
"준민아. 그만해. 너도 아까 빠졌잖아."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고..."
"손가락이 굳었냐? 왜 멈출 수 없냐고.."
준민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일은 게임만이 아닙니다. 인생에선 멈추면 지는 게임이 있습니다. 멈추지 않으면 지는 게임도 동시에 나타납니다. 그 둘을 구별하는 건 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합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다음에 다시 하자." 제가 덧붙였습니다.
제가 말을 하고 나서 뒤를 도는 순간 오락실 할머니는 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방 안에서 저희를 보고 있었어요. 언제부터 우리를 보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놀라 눈알을 살짝 사선으로 굴렸습니다. 이상하게 굴렸더니 눈깔이 저릿했어요. 아마 보기에도 이상했을 겁니다. 어만곳을 보는 저도 이상했으니깐요.
할머니는 저를 향해 손짓을 하며 오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슈퍼 마리오 오락기만 보며 서로 씩씩거리고 있었고요.
저는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두 손은 가방 끈을 잡고서 긴장한 채로 말이지요. 왜 긴장을 했을까요?
사람을 보면 긴장을 하는 버릇은 쉽게 나아지지 않나 봅니다. 아빠도 비슷했거든요. 아빠가 해준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빠. 난 왜 사람들을 보면 떨리지?"
"어떻게 떨리는데?"
"그냥. 그 사람이 헤치는 것도 아닌데 신경이 쓰여."
"이유가 없는데 거리를 두고 싶다는 거야?"
"응. 그런 것 같아."
"준기야. 아빠도 그래. 아빠도 사람들이 무서울 때가 있어."
"아빠는 왜 무서워? 아빠를 해코지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그런데 말로도 사람한테 해코지할 수도 있어."
"욕을 하거나 그렇게?"
"아니. 그건 그냥 욕이라는 말이야. 때때로 사람들은 듣는 사람 모르게 '죽이는 말'을 하곤 해."
"말로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어?"
"아주 천천히 말이야. 물방울 한 방울만큼이라도 부정적인 말을 상대에게 하는 거야. 그 사람은 처음엔 눈치도 못 채지."
"안 좋은 말인데 상대방이 모를 수가 있나?"
"그럼. 어른들의 말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렇게 그 사람에게 살포시 스며드는 거지."
"그런 말이면 그 사람과 대화를 안 하면 되잖아?"
"어른들은 대화 상대를 쉽게 고를 수 없어. 준기 너는 10살이니깐 가능하지만.."
"사람을 천천히 죽이는 말."
"한 번, 하루, 한 달, 일 년 그리고 평생. 나를 죽이는 대화를 계속한다면. 아마 부정적으로 진화되어 버릴 거다."
아빠는 진화라는 말을 썼죠. 당연히 저는 모르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아빤 오랫동안 그런 환경에서 살아오신 건 아닐까 나중에 생각해 보았어요. 조금씩 자연적인 선택에 의해 진화가 이루어지듯 나를 보호하기 위해 저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요.
"준기 아까시나무 알지?"
"응. 아카시아 나무는 아는데 그건 뭐야?"
"아카시아 나무의 진짜 이름이 아까시나무야."
"그래? 그건 몰랐어."
"아까시나무 옆에 가면 너무 향기롭지?"
"응 맞아. 너무 향기롭고 꽃을 쪽쪽 빨아먹기도 하잖아."
"그래 아빠도 어렸을 때 그랬지."
"그 아까시나무가 왜?"
"아까시나무 주변을 잘 보면 풀들이 잘 자라지 못해."
"잘 자라는 것 같았는데."
"아닐 거야. 나중에 다시 한번 잘 살펴봐. 아까시나무는 너무 욕심이 많아서 독을 뿜어내서 주변 식물들이 잘 자라지 못하게 해."
"준기야. '죽이는 말'도 그런 거야. 향기롭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나를 점점 옭좨는 것 같은 그런 것처럼."
아빠와의 그 대화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아무래도 어른들의 대화는 이해가 안 갔으니깐요. 진화라는 말에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고요. 나무는 제가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빠처럼 그런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께 다가가며 저는 아빠와의 대화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마주 서자마자 제 손을 가리켰습니다. 저는 주먹을 쥐었다 움직이며 왼손을 내밀었어요. 오른손보단 왼손이 안전한 것처럼요.
할머니는 조심스레 제 주먹을 살짝 펴고는 손바닥 위에 조그마한 종이 쪼가리를 주었습니다. 곱게 접혀 있어서 버릴 만한 쓰레기 같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친구들이 빈 풍선껌 쓰레기를 그럴듯하게 손에 줄 때마다 속은 저로서는 할머니가 준 종이쪽지가 쓰레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게 당연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리곤 저보고 가라고 하면서 다른 한 손엔 동전 백 원짜리를 쥐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눈을 마주치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뒤돌아 친구들에게 갔어요.
돌아가 받은 동전을 오락기에 넣었습니다. 게임 기록에 말도 안 되는 알파벳으로 이름을 새겨 넣던 친구들이 놀랐습니다.
"띵동~."
"준기. 너 돈 어디서 났냐?"
"네가 웬일이야? 동전을 다 넣고 말이야."
"계속 이어서 안 할 거야?"
게임이 끝났다는 시간이 3초, 2초, 1초로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저는 물어보지 말라는 뜻으로 얘길 한 겁니다. 할머니가 동전을 주었다고 말하기가 애매했거든요. 그렇게 슈퍼 마리오 오락은 이어졌어요.
"해야지. 이번엔 상용이 차례부터야."
할머니가 준 쪽지는 주머니에 잘 넣었습니다. 바지 바깥에서 만지작 거리며 잘 있는지 손으로 확인까지 해보았습니다. 할머니가 뒤에서 볼까 봐 얼른 손을 가방에 올렸습니다. 머리 뒤통수에서 이런 시선까지 신경 쓰는 저는 아주 세심하거나 소심하거나 둘 다일 겁니다.
집에 와서 쪽지를 펴볼까 하다가 아빠가 있어서 나중으로 미루었습니다.
밤이 되어 아빠와 저는 따로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의 쪽지를 조심스레 펼쳤습니다.
'당신, 내 친구를 찾아줄 수 있습니까?'라고 쓰여있었습니다.
글씨는 아주 전체적으론 반듯했지만, 가까이 보면 미세하게 삐툴삐툴했어요. 따라 쓰거나 천천히 쓴 것처럼요.
저는 '당신'이라는 표현이 마음속에 거슬렸습니다. '당신'이란 표현은 어른들에게 쓰는 것 같았거든요.
어린이인 저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어린 제가 어떻게 할머니의 친구를 찾아줄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난 아직 아이인데 어떻게 할머니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
'혹시. 어린 내가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계속 찾아주면 내게 동전 백 원을 계속 줄까?'
결국 저는 어린이의 조그마한 욕심으로 할머니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분명 할머니는 쪽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백 원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그 시절의 백 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기억이, 어른이 되어보니 웃음이 자꾸 나왔습니다.
'하나, 백 원으로 오락을 한다. 그렇지만 한 순간에 끝나버릴게 너무 훤하다.'
'하나, 오십 원으로 아폴로를 사 먹고, 나머지 오십 원은 남긴다. 그렇지만 그 오십 원으론 오락을 못한다.'
'하나, 백 원으로 아폴로 두 개를 사 먹는다. 안돼. 아폴로는 하나면 충분해. 어차피 두 개 사면 뺏길 거야.'
친구들에게 백 원에 대해 설명하기도 싫었습니다. 딱히 할머니와의 비밀로 남겨두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심은 섰습니다. 할머니의 친구를 찾아주기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