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기 앞으로 나오세요."
"네?"
"왜 선생님이 반 구호하는데 제대로 안 따라 하지?"
"....."
"계속 봤는데 '할렐~', '루야~'를 제대로 안 하잖니?"
"...."
저는 앞으로 걸어 선생님께 갔습니다. 뭐 원래 계속 안 했던지라 할 말도 없었습니다. 할 말이 있어도 저는 선생님들 앞에서는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편이었고요.
우리 담임 선생님 이름은 이순자입니다. 나이는 좀 있어 보였습니다. 우리는 3월에 푸근한 인상의 선생님 모습을 보며 조금을 들떴었습니다. 첫날에 저희를 보고 웃어 보이기도 하셨거든요. 보통의 선생님들에게 첫날의 웃음이란 헛것 같았습니다.
반 구호로 할렐루야가 시작되며,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소리로부터 저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선생님의 할렐루야는 단순히 구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이 교실에서 지켜야 할 모든 규칙들이 '교실 십계명'이란 이름으로 하루에 하나씩 추가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장황하게 말을 끝내고 난 뒤, 교실 벽면에 하나씩 감질나게 붙여졌어요.
'1. 담임 선생님의 말은 지켜야 할 규칙이다.'
'2. 친구들 사이에 위아래는 없다.'
'3. 할렐 루야가 우리 반 구호다.'
'4. 일요일은 돌아다니지 않는다.'
'5. 선생님들을 공경하라.'
'6. 친구들끼리 때리지 마라.'
'7. 친구들 사이에서 뒷담화하지 마라.'
'8. 친구들 물건 훔치지 마라.'
'9. 거짓말하지 마라.'
'10. 친구들 물건을 탐내지 마라.'
교실 십계명을 따르면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행동을 멈추어야 할 판이었지요. 물론 선생님의 눈에서만 벗어나면 되었습니다.
"준기야. 우리 반 구호가 무엇이지요?"
"할렐, 루야에요."
"교실 십계명, 세 번째. '할렐 루야가 우리 반 구호다.'"
"준기는 할렐루야를 따라 하지 않은 게 벌써 한 달 정도는 되었어요."
"...."
선생님의 친절하지만, 단호한 말에 전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한 달 정도 되었는데 한 번도 선생님은 지적한 적이 없었거든요. 선생님은 계속 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군.' 창자가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윤기, 준민, 상용이는 눈을 부릅뜨고 큰일 났다는 표정으로 절 불쌍하게 보았습니다. 제 마음속에선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앉았습니다. 한 달이나 선생님이 저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때 감사함이 생겼거든요. 저도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었다는 생각에 선생님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퍼져왔습니다.
'나에게 이렇게 관심이 많았는데 나는 선생님을 실망시켰구나.'
"준기는 앞에서 손 들고 있으세요."
"네." 저는 순순이 대답했어요.
선생님 책상 옆 칠판 앞쪽은 우리들이 벌을 받을 때면 차지하는 곳이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서 있기 시작했습니다. 팔은 저려왔지만 반대로 기분은 좋아졌습니다. 선생님은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연필로 무엇을 적기도 했고 채점도 하셨습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선생님 주변에서는 꽃 향기 같은 향도 나는 것 같았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삼총사가 제 주변을 기웃거리며 웃음을 날렸습니다. 반 구호를 안 외쳐서 벌을 받은 건 제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입으로 삐죽거리며 말했습니다.
'죽는다.'
'메롱' 윤기가 입으로 살짝 모양을 내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셨습니다.
"준기는 선생님 말 잘 들을 것 같았는데.."
"죄송해요."
"선생님은 궁금해서 그래요. 왜 할렐루야를 하지 않았니?"
"그게.."
"혹시 교회에 다니거나 그런 게 싫은 거야?"
"아니에요. 전 교회는 안 다녀요. 근데 그냥 이 말을 따라 하기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이 들어서..."
"어떤 점이 이상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도 있는데 할렐루야라는 구호를 하는 게요."
"그래서 더 이 구호를 선생님이 쓰는 거야. 그래야. 너희들이 구원받는 거야."
"구원이요?"
"그래. 구원. 선생님은 준기 같은 친구들이 안타까워서 그래요."
선생님은 단호했습니다. 왜 구원을 받아야 할까요?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런 말을 했을까요?
"제가 뭘 잘못했길래 구원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그건 준기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두 죄를 가지고 있어요." 선생님은 눈을 빛내며 말씀하셨습니다.
"평소에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런 잘못도 죄지만, 더 큰 죄는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사람들이 가진 원죄라는 거야. 아직 준기가 어려서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선생님은 우리 반 친구들이 그걸 이겨냈으면 해서 할렐루야를 자꾸 외치고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하려는 거야."
"..."
내가 죄인이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니 저는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꼭 학교가 아니라 교회에 온 기분이었어요.
"네 앞으론 잘 따라 할게요."
"그래. 준기야. 넌 잘할 수 있어. 들어가 보세요."
저는 얼른 대답해서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이 정말 듣기 싫었습니다.
선생님의 관심을 받아서 좋았던 기분은 기어코 좌절로 넘어갔습니다.
'내가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라니.'
'내가 죄인이라니.'
"윤기야. 구원이 뭐냐?"
"아. 나도 모르겠어. 뭘 구원을 받아야 하는 건지." 윤기가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어요.
"구원이라는 건. 음. 나중에 천국에 간다는 거야."
"왜 천국에 가야 하는데?"
"멍청아. 천국에 못 가면 지옥에 가니깐 그렇지."
"천국, 지옥 밖에 없어? 그 중간은 없는 거야?"
"교회에선 천국과 지옥밖에 없다고 말해."
"그걸 어떻게 알아?"
"교회에선 그런 말 하면 믿음이 없다고 그래. 그래서 그런 질문하면 안 돼."
"아. 당최 뭔 말인지 모르겠다."
교회에 더러 다니는 준민이가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 문제는 아빠와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비디오 가게로 가자. 점장 형한테 물어봐야겠어." 상용이가 말했어요.
"그래."
하교 후 우린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습니다. 비디오 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점장 형은 영화를 보고 있었어요.
"어서 와. 너네들 이 영화 아니?"
"되게 재미없어 보이는데요."
"이 영화가 케빈 코스트너라는 엄청난 배우를 써서 망한 영화야."
"영화 이름이 뭐예요?"
"워터 월드"
"물 세상?"
"응. 맞아." 점장 형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세상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고, 사람들은 땅이 있는 곳을 찾아다녀."
"땅을 찾아 구원받으려는 사람들과 그 구원을 이용하는 나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지."
"구원? 오늘 선생님이 구원 얘기 하셨어요."
"할렐루야를 반 구호로 하는 게 우리가 구원받길 원한다고 해서래요." 제가 이르듯 말했습니다.
"그건 멍멍이 같은 소리야. 누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거야? 할렐 루야를 외치면 왜 구원이 되는 거지?"
"교회에서는 그렇게 말하잖아요."
"그건 선생님의 생각일 뿐이야. 기독교라는 종교에선 신을 믿는다고 무조건 천국에 간다고 하지 않아."
"그래요? 그럼 누가 천국에 가는 거예요?"
"그건 오직 신만 알 수 있다고 봐. 신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거짓들이 있어."
거짓들이 있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옳은 일은 한다고 생각한 곳에는 거짓이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옳은 곳에서도 거짓이 있는 건가요?"
"옳은 곳이 어디지?"
"학교나 교회 같은 곳이요."
"당연하지. 오히려 믿을 만한 곳에서 거짓들이 더 피어나는 법이다."
"군대도 그래요?" 준민이가 물었습니다.
"당연하지." 점장 형이 대답했어요.
"명심해라.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사람들,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은 잘 걸러서 들어야 해. 그 사람들이 항상 진실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거든. 이 형 말도 걸러 듣고."
천국이 있다면 일종의 도서관일 거라는 어떤 한 작가의 말을 어른이 된 후 읽게 되었습니다. 아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겠지요. 그 당시 나에게 천국이란 지금 이 시간들이 그대로 옮겨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0살의 이 시간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