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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하게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by 우보 Jan 24. 2025

할머니가 자신을 도와달라는 쪽지를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혼자만 알고 있었습니다.


 ‘오락실 할머니에게 무엇을 물어봐야 할까?’라고 공책에 끄적거리다, 편지처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백 원을 주셔서 감사드려요.’

‘사람을 찾아달라는 쪽지를 읽고 이렇게 답장을 보내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지 말씀해 주세요.’     


공책을 찢어 가위로 지저분한 한쪽 면을 잘라내었습니다. 그리곤 딱지 모양으로 접기 시작했습니다. 딱지로 접기 위해서는 종이 하나가 더 필요해 다시 한쪽을 잘라내어 쓰기로 했습니다.     

 

아담한 딱지 모양이 완성되었습니다. 편지처럼 보이지 않는 편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보이자 만족스러웠습니다. 


‘아무도 편지라고 생각 못 할 거야.’      


할머니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걸 숨기고 싶었습니다. 할머니는 분명 저에게만 몰래 쪽지를 주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듯 말입니다.     


집에서 만든 쪽지를 바지 주머니에 잘 넣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났습니다. 사총사와 함께 오락실로 향했습니다.      


“준기 너 어제 어디 숨었냐?”

“어제 운동장에서 철중이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숨었어.”     


“걔는 왜 갑자기 그런데?”

“몰라. 자기도 경찰이라고 하면서 미친놈처럼 달려들었어.”     

“아 똘 아이 자식. 골치 아픈 놈인데.”     


우리는 철중이 욕을 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준민이는 철중이와 원한이 깊었습니다. 지난달이었습니다. 처음 같은 반이 된 둘은 사사건건 대립하다 결국 말다툼을 시작했어요. 1교시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가자 철중이가 준민이에게 다가왔습니다.      


“너 아까 뭐라고 했냐?” 철중이가 말했어요. 

“말도 안 되는 억지 쓰지 말라고.” 준민이가 대답했습니다.    

  

갑자기 철중이가 준민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습니다.      


“너, 이 자식!”

“야. 비겁하게 머리카락을 잡냐?” 머리카락이 잡혀 목이 꺾인 상태에서 소리쳤습니다.

“뭐가 비겁해? 빠져나와 봐!” 철중이는 비웃듯 말했어요.    


철중이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준민이의 머리를 바닥으로 힘껏 내렸습니다. 싸움에선 지지 않는 준민이가 악다구니를 썼습니다.      


“너 죽는다. 이거 빨리 안 놔?”

“너 같으면 놓겠냐?”      


얄밉게도 철중이는 실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철중이는 그렇게 10분 동안 머리카락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어요. 종이 치자 선생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철중이는 바로 머리카락을 놓고 자리로 돌아가 앉아 버렸어요. 준민이는 씩씩거렸습니다.      


“...” 수업이 시작되어 속으로만 삭여야 했어요.      


2교시 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준민이가 이번에는 철중이에게 갔습니다.   

   

“야. 비겁한 놈아. 죽어 봐라.” 준민이가 주먹을 날렸습니다. 

“퍽” 철중이는 피하지 않고 맞았어요.      


바로 준민이의 머리를 또다시 움켜잡았습니다. 아까보다 더 힘을 들여서 머리를 바닥으로 당겼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준민이도 머리카락을 잡히자 고삐 잡힌 소 같았습니다. 전혀 힘을 쓰지 못했어요.   

   

“윤기야. 기억나지? 그 비겁한 수로 싸움을 하다니..”

“그러니깐. 비겁하긴 해. 그렇게 하루 종일 머리카락만 잡고 말이야.”     

“3교시 끝나고 4교시 끝나고도 계속 잡아대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잖아.”

“그런 얘는 상대 안 하는 게 나아. 미친놈이야.”     


우리는 철중이를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비겁한 건 우리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할까요. 철중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겁함을 보여줬거든요.     


연무 오락실에 다 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기계음을 내는 오락기 소리들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끼익.”

“안녕하신가?” 상용이가 메탈 슬러그를 따라 했습니다. 

“야. 메탈 한판 가자.”          


친구들이 게임을 하는 동안 전 오락실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방문은 닫혀 있었고, 할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문틈을 살짝 열고 딱지로 만든 쪽지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습니다.      


“준기야. 문틈으로 뭘 훔쳐보냐?” 상용이가 게임을 보다 말고 놀렸습니다. 

“뭘 보긴 뭘 봐. 문이 열려서 닫은 거지.” 말도 안 되는 대꾸를 했습니다.      


그때 할머니가 오락실 안쪽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자, 할머니가 살짝 웃어주었습니다.      


잠시 후 할머니는 저에게 다가와 손에 백 원을 넣어주었습니다. 동전의 감촉이 나자 전 주머니에 잘 넣었습니다. 


‘할머니는 뭐라고 대답을 적어놓으실까?’ 궁금했습니다. 

‘답장을 안주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준기야 뭘 그렇게 생각하냐?”

“너도 한 판할래? 동전 여기 있어.” 상용이가 인심 좋게 백 원을 내놓았습니다.      


오락하며 건네진 백 원이라는 돈은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할머니가 저에게 준 백 원도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메탈 슬러그 끝은 어디일까?"

"동전을 끝까지 넣어보면 알겠지."

"우리 언제 한번 동전 모아서 같이 끝까지 해볼까?"


"안 돼. 돈만 날릴 거야."

"차라리 게임 잘하는 애들을 데려오자."

"우리 보다 잘하는 얘들이 있어? 없을걸"


오락실을 우리들만큼 많이 들락거리는 친구들은 없었어요. 학교에 가기 전에도 들러 구경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렸기 때문이에요. 연무 오락실은 아침에도 일찍 열었거든요. 장날 아침이 북적이듯 연무 오락실의 아침은 형들까지 가득합니다.


집으로 가는 길. 

계란집 앞을 지나치다가 우린 멈추어 섰습니다. 오늘은 빨간 옷을 입은 계란집 아주머니가 우리들을 불렀어요. 


"얘들아. 이리 와봐."

"..." 


대답도 없이 그 말에 이끌리듯 계란 가게로 갔어요. 계란 가게는 문이 없이 모두 열려 있어서 장터의 가게 같았습니다. 수많은 계란 상자들이 쌓여 있고, 트럭이 와서 실고 담고를 한동안 반복했습니다.


"너네들, 병아리 한 마리씩 키워볼래?"

"병아리요?"

"와 귀엽다. 웬 병아리들이에요?"

"아줌마가 파는 거예요?"


"아니야. 꼭 계란 중에 따뜻한데 놔두면 이렇게 부화하는 애들이 있어."

"윽." 저는 뭔가 징그러웠어요. 

"달걀 중에 유정란이 있어서 그런가 봐."


"유정란이요?"

"응. 병아리로 부화될 수 있는 달걀들이지. 원래 어미가 품어주면 병아리로 태어나."

"신기하네요."


"그럼. 신기하지. 어때? 너네들 오락실만 다니지 말고 병아리도 좀 키워볼래?"

"모두 몇 마리에요?"


"두 마리. 세 마리는 달걀 껍데기 벗기고 나오자마자 죽었어. 슬프게도."

"제가 두 마리 모두 키워도 돼요?" 윤기가 대답했습니다. 


전 키워보고도 싶었지만, 제대로 키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계란집 아주머니가 말하는 모습이 의외였습니다. 파리채로 벌레들을 잡을 때는 사정이 없었거든요. 이렇게 조그마한 병아리들을 보살피는 모습이 살뜰해 보였습니다. 


"윤기 너 잘 키울 수 있냐?"

"걱정 마. 누나들이 잘 키울걸. 흐흐."


역시 윤기는 계획이 있는 듯했습니다. 결국엔 누나들이 키울 거라는 걸 알고 데려가기로 한 거예요.


"병아리들이 약하니깐 잘 키워야 해."

"아줌마가 먹이도 좀 챙겨줄게."

"네!" 윤기는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병아리가 담긴 종이박스를 들고 앞장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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