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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죽음

by 우보 Jan 29. 2025

토요일 오후. 할 일 없이 무료함이 늘어지게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아빠가 일을 일찍 마쳤습니다.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빠 얼굴 보기도 어려운 날들이 계속되고 있던 참에 딱 단절된 것처럼 그렇게요. 이런 날은 드물어서 같이 낚시를 가기로 했어요. 오후 시간을 같이 보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서둘렀습니다.


"아빠. 어디로 낚시하러 가?"

"물치 강으로 가볼까?"

"거기 물고기 엄청 많아."


가물치 강만이 낚시를 하러 갈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어쩌면 대화가 필요했나 봅니다. 당연한 질문을 당연한 대답으로 던집니다.


아빠와 나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모르는 걸 알기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말입니다.


"먼저 물고기 밥 구하러 가야 해."

"지렁이?"

"응. 물고기 밥이 있어야 잘 잡히지."


우린 동네의 바깥으로 걸어갔습니다. 지렁이가 있는 곳은 으레 그렇듯 한적해야 합니다. 느릿느릿 땅을 기어가는 지렁이들이 집 주변에서 보일 때는 마실 나온 것처럼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이나 아이들이 꼬물거리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이 움직이는 걸 보면 같은 속입니다.


마을은 점점 아파트가 들어서며 도시처럼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태어날 땐 농촌이었는데 고향을 떠날 땐 도시가 되어있다는 걸 깨달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치 도시에서만 살았던 것 같은 이질감과 내 기억 바탕 속 농촌의 모습이 기름종이처럼 겹쳐서 혼란스럽게 했던 적이 있습니다. 기억은 하나의 흐름이 아니라 단편들이 겹쳐 있는 것이라는 걸 시간이라는 풀이 덕지덕지 붙여줍니다.


그때도 아직도 논과 밭이 있었어요. 여름의 논은 중학생의 대충 자른 머리 같습니다. 이발사의 손에서 각지게 잘린 그 머리카락처럼 논의 벼들이 정갈합니다. 그 옆을 걸어 지나갈 때 바람이 불어옵니다.


바람은 벼들에게 움직임을 주고 벼들은 그에 맞추어 춤을 춥니다. 논이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둑으로 나뉜 논들은 서로 화답하며 다른 시간에 벼들이 움직입니다. 바람은 하나지만 그에 대응하는 생명들은 제각각입니다.


"아빠. 벼들이 꼭 춤추는 것 같아요."

"준기가 표현이 좋구나." 아빠는 새삼스런 저의 표현에 살짝 비켜나듯이 대답했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얘들아 벼들이 지랄발광이다.' 친구들 앞에서였다면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밖으로는 싸울 때 빼곤 욕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속으론 어쩌다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하고 상상하곤 했습니다.


'상상의 나래를 편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류의 상상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 주변엔 거름거리를 쌓아놓은 들판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목적지예요. 이곳에서 지렁이를 잡을 예정입니다. 그 땅의 주인은 있었지만, 지렁이는 그 땅에 그냥 살아가는 존재이니 잡아도 될 것입니다.


"지렁이 잡는 게 너무 징그러운 거 같아."

"너무 크지?"

"응. 뭔가 움직이는 게 너무 꿈틀대니깐."

"물고기는 그런 큰 지렁이는 잘 못 물어."

"그럼?"

"참 지렁고, 작고 더 진하면서 몸에 세로줄이 선명한 얘들이 물고기 밥으로 딱 좋아."


참지렁이는 평범한 지렁이보다 작았습니다. 장점이 있었는데 덜 징그러워 귀여워 보였습니다.


"이거야?"

"맞아. 참지렁이는 잘 안 보여서 더 깊게 파야해."

"그래도. 얘는 좀 귀여운 면이 있는데?"

"지렁이가 귀여워?" 아빠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렁이가 있을만한 곳을 나뭇가지로 힘들여 팠습니다. 그런 저를 보면서 아빠는 다른 쪽을 가리켰어요.


"손으로 파기 어려운 곳엔 지렁이도 살기 어려워. 부드럽고 막대기로 꽂으면 잘 들어가는 곳이 지렁이가 있는 곳이야."

"이미 지렁이가 땅을 부드럽게 해 놓은 거야?"

"그럴 수도 있고. 거름이 많아서 지렁이가 움직이기 좋을 수도 있지."


사람이나 지렁이나 자기가 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환경. 움직이기 편안한 곳. 문득 오락실 할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시끄러운 오락실 한편에서 생활하는 할머니는 그곳이 좋은 건지 궁금했습니다. 오락실을 좋아하는 저였지만 그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도무지 어려웠습니다.


땅을 살짝만 파헤쳐도 꿈틀대는 생명체들이 바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대부분 징그러운 지렁이들이 파닥대며 나왔지만 때때로 귀여운 녀석들도 잡을 수 있었어요.


"아빠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아?"

"글쎄. 아빠도 들었어. 어렸을 때부터. 큰 지렁이는 낚싯바늘에 끼울 때 잘라야 해서 너무 번거로워."


낚시를 하는 것에도 어떤 법칙이 있었습니다. 아빤 그런 식으로 세상일을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낚시하는 게 쉬운 게 아니네."

"그럼. 낚시하는데 필요한 지렁이를 준비하는데도 이렇게 경험이 필요한 법이야. 세상일이 다 그래. 쉽게 이루어지는 건 하나도 없어."


쉽게 얻어지는 것은 누군가 나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관계를 가질만한 사이입니다. 오락실 할머니는 어떤 관계로 이어질까요. 지금 내 주변에서 가장 애매한 관계였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대화도 해본 적은 없지만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 특이하게 쪽지로만 질문하고, 이유 없이 백 원을 주는 사이.


"아빠. 이유 없이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어떤 사람이라니." 그렇게 말하며 아빠는 웃었어요.


"글쎄. 도둑놈 또는 사기꾼?" 아빠는 장난스레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진짜?" 전 심각해졌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아빠한테 말해."

"아직은 없어."

"아직은 없다는 건, 곧 그런 사람이 생길 거라는 거야?"

"응.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

"친구는 아닐 거고, 오락실 할머니 말하는 거니?"

"비슷하긴 한데, 아니야."


아빠는 미소를 띠며 더 묻지 않았습니다. 아빤 말을 멈추어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강 물길을 흐트러트리는 징검다리가 얼기설기 놓여 있었습니다. 한 줄로 넘어가며 강바닥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강 속에 물고기 보이니?"

"아니, 여긴 없나 봐."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니깐 없을 거야."

"물고기도 사람을 피해 다니나 보네."


"사람들이 잘해줘야 다니는 길에서 기다리겠지."

"맞아. 지난번에 동네 삼촌들이 전기 막대기로 옆 동네 하천을 아예 지지고 다니던데?"

"그러면 안 되는데 쉽게 잡을 수 있으니깐."

"하면 안 되는 걸 그 삼촌들은 왜 하는 걸까?"

"먹지도 못할 고기들을 몽땅 잡는 건 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다들 그렇게 하니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당연하게 하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물고기를 몽땅 잡고 싶어 질까요?


동네 삼촌들은 네모나고 무지막지한 자동차 배터리를 옆에 끼고, 밤에 몰래 하천을 습격했습니다. 습격당한 하천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쉽게 받아들였고요. 물속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의 파동은 유유히 흘러갔습니다. 둥실둥실 떠오른 죽음의 결과물들을 삼촌들은 웃으며 그물망에 담았을 겁니다. 그 시체들을 온 동네 사람들은 한 마리씩 공유하며 입을 닫았고요.


내가 죽는다면 저는 스스로 선택에 의한 죽음을 맞고 싶습니다.


"준기야. 낚시로 잡는 물고기는 자연스러운 죽임이니? 급작스런 죽음이니?"

"그건 급작스런 죽음이지."

"아니야. 자연스러운 죽음이야. 어떤 동물은 익숙한 동물에 잡혀 먹히는 게 자연스러운 죽음이거든."

"그럼 전기에 지져져서 죽은 물고기들은."

"그것도 자연스러운 죽음이야. 수단이 어떻든 결국 잡아먹으려고 그렇게 된 거니깐."


아빤 동물은 모두 자연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처럼 나이 들어 병들어 죽도록 다른 동물이 기다려주지 않는다구요. 오직 사람만이 시간을 기다려 병에 들어 죽을 뿐이라고요.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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