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 같지만 날이 점점 뜨거워지는 6월이 되었습니다. 주말 오후 날이 더워 돌아다니기 지친 우리는 연무 오락실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오늘은 의자를 끌어다가 시원한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게임하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의자를 빙 둘러앉은 우리는 이 텁텁한 시간 속에서 감질맛을 느꼈습니다.
"날이 더워지니깐 오락하기도 귀찮다." 준민이가 땀을 삘삘 흘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맞아. 어떻게 된 게 매년 점점 더워지는 것 같다."
대화는 지루하고, 행동은 게을렀습니다.
"야. 이제 여름 몇 번이나 겪었다고 매년 점점 더워진다고 그러냐?" 준민이가 핀잔을 주었습니다.
"벌써 학교 들어오고 3년째이니깐 비교할 만 하지." 윤기는 그럴듯한 대꾸를 했고요.
"지구가 점점 더워진대. 선생님이 그랬어."
"봐봐. 매년 더워진다니깐."
"야 조끄만 놈들아. 조용히 안 하냐!"
동네 형이 시끄럽다는 듯이 게임을 하다 말고 뒤돌아 보며 소리쳤습니다. 우린 바로 입을 다물고 오락 소리로 매캐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덜컥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오락실로 들어왔습니다. 우린 단박에 고개를 문쪽으로 돌렸습니다. 연한 밤꽃색의 점퍼를 위에 걸치고, 바지는 바랜 하늘색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사내는 좌고우면 하지 않고 할머니가 있는 방으로 가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습니다. 행동에 거침이 없어 보였어요. 주먹으로 쳤지만, 그 소리는 수즙게 작았습니다.
"할머니 계세요? 저 왔습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요"
"..." 말없이 문이 열렸습니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그 남자를 방으로 들였습니다. 문은 원래 그래야 한다는 듯이 드르륵 닫혔습니다.
"할머니, 그 주소로 찾아가 봤는데..." 그 사내의 말은 소음에 묻혀 흘러가 버렸습니다.
"할머니한테 손님도 오네."
"그러니깐. 원래 오는 사람이었나 봐."
"아는 사람 같던데."
"옆 동네에서 복덕방 하는 장 씨 아저씨 아냐?"
"복덕방이 뭐냐?"
"그거 있잖냐. 집 소개해주는 그런 곳."
"복덕방 아저씨가 왜 여길 왔지?"
"오락실 내놓으려고 그러시나?"
"아닌 거 같은데. 들어보니 어디 주소를 찾아갔다고 하는 것 같았어."
"사람을 찾는 거 아닐까?" 제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흘렸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할머니에게 누군가 찾아오는 사람을 처음 봤기 때문일 거예요. 하루 종일 뜨뜻 미지근한 일뿐이었는데,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저에게 할머니가 준 쪽지와 복덕방 장 씨 아저씨 방문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뭘까? 할머니는 꼭 찾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걸까?'
문이 열리며 사내와 할머니가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방안의 두 눈은 저희 쪽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오락실에서 오락은 안 하고 수다나 떨고 있는 저희에게 핀잔을 주는 것처럼요. 아닐 것이라고 당연히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사소함을 넘기지 못하는 성격인 것 같았습니다.
대뜸 할머니는 손을 들고 우리들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였습니다. 저만이 그 뜻을 알겠다는 듯이 일어나서 방 쪽으로 걸어갔어요. 나머지 친구들도 제 뒤를 따랐습니다.
"할머니. 저희 부르셨어요?"
"이 아이드리 도와 주를..." 할머니가 복덕방 장 아저씨에게 말했어요.
대답이 없을 줄 알고 예의상 여쭈었는데 처음으로 할머니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우린 조금 놀랐습니다. 할머니 목소리를 처음 들었거든요.
오락실 할머니는 완성되지 못한 문장으로 말을 했습니다.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발음이 명확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완성되지 못한 말이 끝난 후 어색한 손짓으로 우리에게 백 원씩을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이 아저씨가 너희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는구나. 나쁜 일은 아니니깐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할머니는 반 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썼습니다. 이번에는 완성된 문장이었습니다.
저희는 할 일도 없었거니와 뭔가 탐험하는 기분이 들어 할머니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좋아요. 어떤 일인데요?" 윤기가 나섰습니다.
"응. 어려운 일은 아니야. 이 아저씨가 사람을 찾고 있는데, 찾을 수가 없네. 아마 너네들이 동네를 다니다가 혹시 알던 사람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이렇게 부탁하는 거다." 장 아저씨가 말했어요.
"이 동네, 저 동네까지 저희가 다 훑고 다니니깐 웬만한 사람은 저희가 다 알아요." 준민이가 당연한 말을 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그렇겠지. 너네들 보니 동네 구석구석 싸돌아다닐 것 같더라. 오락실 들어올 때부터 너희들 심심한 표정이 얼굴에 쓰여있어." 아저씨는 조그마한 눈과 입과는 달리 목소리는 크고 굵었습니다.
저는 믿음이 가는 목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도 믿음이 가기 때문에 장 아저씨에게 부탁했을 겁니다.
"누구를 찾아야 해요?" 할머니가 찾으려는 사람이 분명했습니다. 쪽지에서 부탁했던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찾아야 하는데 누군지는 잘 모른단다."
"엥? 그게 무슨 말이에요?" 상용이가 맹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찾아야 하는 사람도 없이 어떻게 사람을 찾아요."
"그러니깐 너희들에게 부탁하는 거지."
"그럼 어떤 사람인지 힌트라도 줘야죠."
"남자예요? 여자예요?"
"그것도 몰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근데 어떤 특징이 있다고 하더구나."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른다면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말했습니다.
"그래도 이 동네 아니면 근처에 살았던 사람은 확실하니깐 아마 찾을 수 있을 거다."
"아저씨. 이 사람은 할머니가 찾는 사람이에요?"
"그건 반은 맞아. 할머니가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려면 이 사람을 거쳐야 하거든."
"음." 준민이가 골똘한 표정으로 장 아저씨를 바라보았습니다.
"저희 사총사만큼 이 동네를 구석구석 다니며 노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으슥한 곳만 찾아다니려 노력하던 저희에게 안 가본 곳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이 마을의 모든 길은 개미굴의 동굴처럼 눈감고도 다닐만한 곳이었거든요. 걱정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서 놀다 보니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촉이 안 왔다고나 할까요.
"이 사람은 살아있다면 70세 정도 되었을 노인처럼 보일 거다."
"아니, 노인을 찾아야 하는데. 할머니인지, 할아버지인지도 모른단 말인가요?"
"그래. 그 이유는 오락실 할머니도 그 사람을 직접 본 적은 없거든. 전해 듣기만 한 거야. 그것도 아주 오래 전일이고."
그 이유라면 찾으려는 사람의 특징을 정확하게 지칭하지 못하는 할머니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는 느낌은 어떤 걸지 저는 조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엄마를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할머니의 감정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어떤 흔적? 단서? 같은 것도 알려주세요."
"그렇지. 그걸 알려줘야지. 이 사람은 왼쪽 눈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다고 하는구나."
"찡그리는 게 어떻게요?" 제가 흉내를 내며 얼굴을 쥐어짜보았습니다.
"말을 할 때 왼쪽 눈 쪽 볼이 같이 움직이며 눈도 같이 움찔한다는 거야."
"그리고요? 다른 특징은 없어요?"
"일본말을 아주 잘하신다고 한다. 일정시대 때부터 일본 사람들과 일을 같이 해서 유창하대."
'유창하다.' 이 말이 저에겐 어려웠습니다. 유창한 것은 잘한다는 것인데, 잘하는 것과 비슷한 것인지, 잘하는 것보다 훨씬 잘한다는 뜻인지 헷갈렸거든요. 일본말을 못하는 우리는 그 유창함이라는 걸 판단할 수도 없을 것 같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