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한적한 오후.
상용이가 동전을 딸그락거리며 오락실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얘들아. 오늘 동전 많아. 오락실 가자."
"오. 너네 아빠 또 회사에서 몰래 가져왔지?"
"아니거든. 아빠가 정당하게 번 거거든."
"월급을 동전으로 주는 회사가 어디 있냐?"
"아빠 회사는 버스 회사라서 동전으로 줘."
여름이 다가오면서 우리는 상용이 아버지가 버스 회사를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버스 기사로 일하며 동전통에서 몰래 500원짜리만 골라오는 것 같다고 옆 반 용근이가 슬쩍 알려주었습니다.
그날은 연무 오락실에서 슈퍼 마리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상용이의 동전으로 저, 준민이, 윤기, 상용이가 돌아가며 한 판씩 도전했지요.
마리오가 '굼바'를 납작하게 누를 때마다 움찔했습니다. 우리들의 목도 같이 까닥거렸어요. '굼바'를 납작하게 만들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닿아서 죽을 때는 내 손을 들고 노려봤습니다.
"아 !!! 좀 더 점프할걸."
마리오가 판을 완료하고 깃발을 하나씩 성취할 때마다 우린 박수를 쳤습니다. 악당 중의 악당 '쿠파'를 처치하고, 공주를 구할 때마다 공주는 다른 성으로 잡혀가며, 우리 동전도 그렇게 끝이 나고 있었어요.
"이 놈의 거북이들은 날개를 날고 날아다니네."
"진짜 기발하지 않냐? 거북이처럼 느린 얘들한테 날개를 달다니 말이야."
"느리니깐 차라리 공중으로 날려버렸나 보다."
"난 이 게임 좋은 점이 말이야. 계속 반복되어서 좋아."
"야. 다른 게임도 계속 반복되잖아."
"아니야. 슈퍼 마리오는 좀 달라. 뭐랄까, 장면은 새로운데 똑같은 곳에서 익숙하게 게임하는 느낌이 들거든."
"그거 안 좋은 거 아니냐? 같은 느낌이면 지루하잖아."
"아니지.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우리 같은 애들이 계속하게 하려고 말이야."
"그럴듯한 말이네. 배경이 비슷하니깐 쉬워 보인단 말이야. 근데 이 게임은 어른들을 위한 게임 같아."
"왜? 어른들을 위한 게임이야?"
"마리오가 버섯을 먹으면 커지잖아. 그리고 꽃을 먹으면 불을 쏘지."
"그게 왜 어른들을 위한 거야?"
"조그마한 마리오는 뭔가 부족해 보이잖아. 짜부되어 있는 것 같고 말이야."
"그렇긴 해. 버섯을 먹은 마리오가 진짜 마리오 같아. 작은 마리오는 그냥 덜 자란 느낌이랄까?"
"그래서 완전한 어른이 되어야 제대로 힘을 쓰지."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슈퍼 마리오가 벽을 만나면 어른 슈퍼 마리오는 벽돌을 부셔야 하지만, 조그마한 녀석은 유유히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난 오히려 우리 같이 어린이들을 위한 게임 같은데?"
"다 크고 싶어 하잖아? 어른이 되고 싶고, 빨리 크고 싶고 말이야."
"그 말도 일리가 있다야."
"근데 왜 하필 버섯이야?"
"버섯은 몸에 좋잖아. 산에 가도 여기저기 널려있고."
"산에 있는 버섯은 대부분 독버섯이래. 먹으면 큰 일 난다고 했어."
"슈퍼 마리오는 독버섯을 먹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몸이 커지겠지. 버섯 부작용일걸."
"백날 느타리버섯 먹어봐라. 키 커지는지. 똥만 오질라게 싸지."
독버섯을 먹으면 커지는 슈퍼 마리오.
나도 버섯으로 한 순간 확 커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은 왜 이렇게나 긴 걸까요? 유치원부터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앞이 막막합니다. 물론 저는 유치원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글을 학교 가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 시절 저는 어린 시절은 얼른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느릿느릿 굼바보다 더 느리게 말입니다. 어린 시절을 정말 즐겼다는 생각은 어른이 되고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굼바가 생각보다 빨리 움직인다는 것도 어른이 돼서야 깨달았고요.
어른의 하루도 어린 시절의 그때와 같이 느릿느릿하게 그저 지나가길 바라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거 아냐?"
"뭐가?"
"슈퍼 마리오는 우리 같은 어린 시절에 대한 어떤 뭐랄까...."
상용이는 말이 짧습니다. 생각도 짧은 건 아닐 텐데 그렇게 말이 짧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상용이와 애증의 관계지만 머리가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순 없었습니다. 저의 소중한 동전 꾸러미 같은 거였거든요.
"향수?"
"맞아. 향수. 어른이 되면 이때를 그리워한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던데."
"정말이야? 누가 그러디?"
"삼촌이. 삼촌은 그립다고 하던데. 기회만 주어지면 다시 어린이로 살고 싶대."
"다시 못살지. 암. 삼촌은 꿈 깨야겠다."
"삼촌이 그랬어. 인간이 이렇게 다른 동물들 위해 있는 건. 그러니까 지배하는 건 어린 시절이 길어서 그렇대."
"그건 또 뭔 멍멍이 같은 소리냐? 어린 시절하고 다른 동물 지배하는 거랑 뭔 상관이야."
"그러니깐. 우린 호모 모시기야."
"호모 같은 소리 하네. 흐흐."
준민이가 호모라는 단어가 나오자 눈을 크게 뜨고 웃으며 끼어듭니다. 윤기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습니다. 그때도 둘은 호모라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것 같았습니다.
"우린 호모 뭐 인간의 후손들이라는 거지. 근데 호모 머시기랑 다르게 네안 머시기라는 인류도 있었대."
"음. 침팬지랑 오랑우탄처럼 말이지?"
"고릴라도 그렇지."
"응. 원숭이들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르기도 하잖아."
우리는 뜨문 뜨문 깊은 대화를 해왔습니다. 다만 이번처럼 과학적인 주제로 대화하기는 처음이었어요. 말도 안 되는 내용도 깊게 파고 들어가고 반대하고 찬성하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모두가 처음 듣는 내용이라 더 집중이 되었습니다.
"맞아. 동물원에 가면 뭔 원숭이 종류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말이야."
"원래 호모 뭐랑 네안 머시기는 인간이지만 다른 종류래."
"그거랑 어린 시절이랑 뭔 관련이 있어?"
"네안 인간들이 힘도 세고 그랬는데, 지금 세상에 남은 건 호모 인간 들이라는 거지."
"힘이 셌는데도 다들 죽어버렸다는 건, 호모 인간들에게 좋은 점이 있었겠네."
"삼촌 말로는 그게 어린 시절과 연관이 있다는 거야. 어린 시절을 충분히 오래 보낸 호모 인간들은 훨씬 더 생각을 잘하게 되었대."
"생각을 잘해서 네안 인간들을 이겨낸 거네?"
"이겨냈다고 보기보단 힘든 환경에서도 잘 살아남은 거지."
"어린 시절이 중요하구나. 어린 시절에 충분히 놀아야 하는 거네. 그래야 생각을 잘하지."
"네안 인간은 어린 시절이 짧아서 죽는 것도 일찍 죽었대."
"상용이 삼촌 되게 똑똑하다. 뭐 하시냐?"
"대학 선생님이야."
'호모 인간'은 유년기가 훨씬 길어 '네안 인간'보다 수명도 길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60년을 사는 인간과 30년을 사는 인간이 경쟁하면 당연히 60년을 사는 인간이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60년을 살아도 30년을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30년을 살아도 60년을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요. 오직 그 사람만이 자신의 시간들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결말도 마찬가지고요.
상용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삼촌 자랑으로 막 넘어가려는 찰나였습니다.
"야. 알겠으니깐. 슈퍼 마리오 다음 판 하게 동전 좀 더 꺼내봐."
"꺼내보라니. 나한테 삥 뜯냐?"
"삥 뜯는다니 좀 같이 쓰자는 거지."
"마지막 동전이다. 죽으면 안 돼."
"알았어. 잘 보기나 해."
게임은 언제나 끝이 있고 죽기 마련인데, 우리의 대화에서 '죽지 마.', '안 죽어.' '걱정 마.'는 계속 반복되는 구호였습니다.
영원이 계속되는 게임이 있을까요? 안 끝나는 게임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