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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뿌리

김세진, 583권

by 우보

감상

한국군의 뿌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일 것입니다.

식민지와 망국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현재도 이어지는 좌우 대립의 현장이 계속되는 곳에서 말입니다.


저자의 한국군 또는 망국의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은 인정할만합니다.

기저에는 '독립군이 과연 한국군의 뿌리가 맞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일본군, 만주군 출신과 거기에 미군의 영향으로 현재의 강력한 국군이 탄생했다는 점일 겁니다.


독립군 또는 광복군 출신들이 정신적인 바탕이 될 수는 있었겠지만, 합법적 폭력 조직인 군대가 과연 정신 무장만으로 현재의 강한 군대가 될 수 있었을까라는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약자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첫째로 나라가 작습니다. 인구도 주변국에 비해 적습니다. 당연히 군대의 힘도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성리학적 가치 체계가 우선시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런 환경에서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중국만 보더라도 처절한 역사의 현장을 겪었고, 현재도 중국-대만으로 나누어져 전쟁을 하느니 마느니 하고 있습니다.


결국 수 많은 정치 논리의 제외, 군대의 운용에 필요한 규범만 입히자는 저자의 의견이 보여집니다. 그렇게 시간이 필요했던 작업이 최근의 비상계엄으로 군대가 정치논리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안타깝기도 합니다.


책의 오류가 굉장히 많습니다. 년도 실수, 인물명 오기 등 수 십개를 읽으며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역사학자의 감수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 책의 한 문장

지피지기 백전불태


1

1392년 조선을 건국할 당시의 군사제도는 '진관체제'였다. 각 도의 관찰 사(도지사) 아래 둔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군사 업무를 담당하고, 현장 지휘는 군/현의 수령이 맡는 방식이다. 지역을 지키기엔 유리하지만 국가 적 규모의 전쟁에는 취약한 제도였다. 또한 수령은 대부분 성리학을 공부한 문관들이어서 군사적 전문성도 부족했다. 그래서 조선은 1555년 왜구 침략 (을묘왜변)과 1583년 여진족 침임(이탕개의 난)을 거치며 '제승방략 체제'로 바꿨다. 적이 대규모로 침입하면 각 지역에선 군사를 한데 모으고 중앙정부 는 지휘관과 중앙군을 내려보내는 방식이다. 북쪽에서 여진족을 상대할 때 는 나름의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교통과 통신이 열악한 상황에서 대규모로 빠르게 침입하는 적을 적시에 상대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조선은 일반 양민 이 스스로 돈을 들여 군인의 역할을 맡는 부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평소에 군사훈련을 진행하기도, 위기 상황에서 병력을 빠르게 모으기도 힘든 현실이었다.


2

일본군이 동래를 함락시키자 선조는 제승방략에 따라 4월 17일 이일(李 鎰, 1538~1601)을 순변사로 임명했다. 그는 이탕개의 난을 진압하고 전라도 수군절도사, 함북 병마절도사를 맡는 등 34년 넘게 실전 경험을 쌓은 대표 적인 무관이었다. 이일은 중앙군으로 장부에 등록된 300명을 소집해 경상 도 병력이 집결하기로 되어있는 대구로 가려 했지만, 사람이 모이지 않아 허송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징집 대상자 명단이 차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당시 조선 중앙군 체제는 엉망진창이었다. 마침 경상도 군현들은 위기계획 에 따라 병력을 소집하고 각각 정해진 장소(대구, 울산, 창원 등)로 모이고 있었 다. 하지만 중앙에서 장군이 내려오질 않아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3

주화파 최명길은 후속 조치를 담당하며 왕과 국가를 지키고자 헌신했다. 그런데 결사 저항을 외쳤던 척화파 김상헌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매 는 일종의 쇼를 펼친 것도 모자라 남한산성 문이 열리자마자 고향 안동으로 도망갔다. 3년 뒤 청나라로 잡혀가 삼전도 항복의식에 빠진 이유를 조사받 을 땐 '늙고 병들어 따라가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그런데 후대 성리학자들, 특히 노론 지도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최명길을 '명나라에 대한 배신 자이자 간신'으로 평가하고, 김상헌을 '명나라에 끝까지 충성한 충신'으로 떠받들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소재로 했다. 영화에서 김상헌은 인조가 항복을 결정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충신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최명길(1647년)보다 5년, 인조(1649년)보다 3년이나 더 살았다. 즉, 영화 속 장면은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역사 왜곡 그 자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김상헌은 충신으로, 최명길은 간신으로 여기는 경우 가 많은 괴이한 한국 사회다.


인조는 김상헌을 아래와 같이 비판했다.


"김상헌은 평소 나라를 위해 죽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왕을 버리고 무식한 자들의 앞장을 섰다. 그는 웃음거리조차 못 된다. 그런데 무식한 자들이 오히려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김상헌처럼)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얻기란 쉽다.” - 「인조실록 15년 9월 6일


4

조선은 연산군 시절 노비들이 납을 활용해 은을 분리하는 혁명적인 기술 (연은분리법)을 개발했다. 그런데 성리학에선 상업과 공업을 천박하게 여겼고 기술은 버려졌다. 오히려 일본이 이 기술을 습득해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그 결과 일본의 은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 를 바탕으로 강력한 세력을 꾸릴 수 있었다.


5

전통적으로 막부에 반감을 갖고 있던 세력들은 '천황 중심주의'를 내세 워 막부를 타도하려 했다. 대표적으론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있 다 그는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로 여겨지며 야스쿠니 신사에 가장 먼저 봉 해졌다. 그는 한반도를 정벌해야 한다는 이론을 집대성했고, 이토 히로부 미,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포함해 조선 식민지배, 일본제국 건설에 결정적으 로 기여한 많은 사람의 스승이다. 또한 일본에서 가장 오랫동안 총리를 역 임했던 아베 신조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6

조선은 과거제도를 통해 무관(간부)을 선발했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몇몇 세도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인재선발과 등용 과정이 문란해졌고, 고종 때는 이름만 쓰면 벼슬을 주는 '공명첩'이 거래되는 등 관료체제가 망가졌다. 지방군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속오군+잡색군 체제'로 바뀌어 양민, 상민, 천민(노비) 등이 동시에 복무했다. 하지만 양민들은 천민과 함께 하 는 것을 기피했고, 매년 일정 금액을 내며 병역을 면제받았다. 군대에는 상민과 천민만 남았고 무관들도 박한 대우를 받았다. 훈련도 없는 오합지졸이 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속오군은 노비와 천민의 집단이다. 심지어 어린이와 늙은이까지 섞여 있다.”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7

군대의 뿌리를 인식하는 관점은 시기, 사건, 의사결정 또는 인물 등에 따 라 달리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임오군란은 중요한 특이점이다. 국가가 군 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다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이 사건으로 인해 국 내외 정세도 크게 요동쳤기 때문이다. 특히 한반도에 외국군이 처음으로 주 둔하게 된 사건이다. 외국군은 주둔하는 국가의 정치, 사회, 경제, 군대 전반 에 큰 영향을 미친다. 모든 제국이 이익이 걸린 지역에 군대를 배치하려 했 던 이유기도 하다. 임오군란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민비 정권이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었다.

현재 한국 사회는 임오군란을 '군인 월급차별' 또는 '신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에서 비롯됐고 그 책임을 군인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사건을 부 르는 명칭 '군인반란'에도 그런 의미가 담겨 있다. 정작 부정부패로 국가와 국방을 망치고, 외세를 끌어들여 권력 다툼하던 지도층은 피해자로 여겨지 는 경향이 강하다.


8

조선이 군사제도와 운영방식을 개선한 목적은 오직 궁궐을 지키기 위함 이었다. 왕실과 권력층이 사치하며 부정부패가 만연해 국고는 바닥나고 외국은 내정에 간섭했다. 군대가 써야 할 기초 무기와 탄약마저 보급할 수 없었다. 경복궁 경비병을 빼곤 해안과 국경을 지키는 군대는 사실상 없었다.


9

대원군이 없었다면 민비 암살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즉, 실정을 거듭하고 청나라-일본-러시아 사이를 멋대로 오가던 민비는 대원군과 일 본에 의해 살해됐다.


10

이완용은 독립협회 위원장, 회장 직책을 맡으며 가장 많은 보조금을 냈고, 협회 존속 기간의 2/3를 주도했으며 독립문의 현판을 썼다.


11

무엇보다도 대한제국이 잠시 얻었 던 '자주성'은 러시아와 일본의 힘이 균형을 이루고 국제 정세가 변동하는 가운데 잠깐 주어졌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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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피해자였을까? 하야시는 조약을 체결하기 전 고종에게 2 만원(현재가치 약 25억 원)을 지급했다. 즉 고종은 돈을 받고 국권을 팔아넘겼 다 ‘매국노에게 협박받은 고종은 피해자', '고종의 승인 없이 매국노들이 멋대로 맺은 조약은 무효'라는 주장이 대부분이지만, 실제 기록들은 '고종이 돈 받고 외교권을 팔았다'고, '무책임하게 권한을 위임해 나라를 넘겼다' 고 일관되게 말한다. 결국 을사늑약의 주인공은 고종이다. 을사5적은 그 명령을 따른 실행자이자 공범이었다. 심지어 고종은 조약을 맺은 직후 이토 히로부미에게 편지를 보냈다. 과연 '이완용'만 매국노일까?


“새 협약을사늑약)의 성립은 두 나라를 위해 축하할 일이다.

짐(고종)은 병에 걸려 피로한데,

당신(이토)은 밤늦게까지 수고했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소”


13

독립운동가가 맞서야 할 대상은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출신과 지역할 당도 아닌 '일본제국'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했다는 대다수 기간은 조선인끼리 서로 싸우고, 이를 봉합하려고 회의를 열고 중재 기관을 만들고 다시 분열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서로를 밀고하고 암살한 경우도 많았다. 일본제국은 이런 '조선인의 성향'을 활용하며 독립운동을 치밀하게 방해했다.


14

한편, 홍범도는 소련 적군에 협조적이었다 그는 독립군 중 유일하게 1921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혁명의 주인공인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다. 레닌은 '고려혁명군 지휘관' 홍범도를 높게 평가하며 군모 군복, 이름을 새긴 권총, 금화 등을 선물했다. 홍범도는 연해주 조선인 지도자로 서 활동하고 1927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런데 1937년 스탈린이 내 린 고려인 강제이주명령으로 인해 조선인 모두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추방 당했다. 홍범도는 크즐오르다(Kyzylorda) 지역에 거주하며 소련 정부에게 연금을 받고 고려극장 경비소장 정미소 노동자 등으로 지내다가 1943년 10 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등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 았지만, 소련 입국신고서에 소원을 묻는 질문(9번)에 '고려 독립'이라고 쓰기도 했다.


15

장준하는 끝없는 파벌 다툼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 임시정부를 폭격하겠다'며 임시정부 사람들을 격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16

군무국장 참페니는'군사영어학교를 만들고 60명을 교육하 려고 한다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출신 각 20명씩 할당한다'며 일본군 출 신 이응준, 만주군 출신 원용덕, 중국군 출신 조개옥 등에게 입학생을 추천 해달라고 의뢰했다. ....

그래서 군사영어학교 학생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 주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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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43년까 지 조선인의 해군 입대를 허락하지 않고, 전쟁 중에도 조선인에게 함정근무 대신 육상근무나 가미카제 자살특공대 임무를 줬다. 즉, 일제 해군으로 서 해상 함정근무를 경험한 조선인은 없었다. 그 결과 식민지배 기간에 중국, 일본 등 민간 선박회사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해군 창설의 주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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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공군의 대부'로 여겨지는 미 공군 헤스 대령(Dean Elmer Hess, 1917~2015)도 있다. ... 문구는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다. 2차대전에 참전하며 자신이 몰던 기체에 적은 라틴어 'Per Fidem Volo(I fly by faith)'를 한국어로 표현한 문구다. 현재 한국군 공군에는 '신념의 조인'이란 제목의 군가가 있고, 용산 전쟁기념관 등에도 전시하고 있다. 그는 '항공전의 영웅','대한민국 공군의 대부' 그리고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시로 한국에 찾아와 고아들을 돌보고 자녀로 입양하기도 했다.


19

김영삼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군내 비밀사조직을 숙청했다. 그때까지 하나회는 육사 11~36기 약 250명, 알자회는 육사 34~43기 약 120명이 활동했다 또한 전두환, 노태우의 각종 범죄행위를 수사해 기소했는데 법원 은 내란죄 뇌물죄 등으로 전두환에겐 사형을, 노태우에겐 유기징역 최고형 을 선고했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군내 사조직 숙청 후 한국군은 헌법 에 명시된 정치적 중립을 준수하며 문민통제를 받고 있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까지도 하나회, 알자회 출신 일부는 공직에서 출세했다.


20

1948년 건군 초창기 육해공군은 입을 전투복이 없어 일본군이 남기고 가거나 미군이 쓰던 전투복을 입어야 했다. 1949년 주한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775년 당시 미국 군대 수준"

"한국인의 격렬한 민족적 자부심을 제외하면,

한국군은 추천할 만한 점이 없다. 단체훈련도 없고

사격술은 보잘것없고 장교들은 병사를 지도하는 방법도 몰랐다."


"대한민국은 장제스 정부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한국전쟁 직전 군사고문단 보고서(1950년 6월 15일)


21

북한 공군은 1949년 창설됐다. 일반적으로 북한이 친일파를 철저하게 청산했다고 알고 있지만 공군은 달랐다. 일본군 출신들은 1945년 10월 25 일 신의주항공대를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평양학원에 만든 항공과는 항공 대대/연대/사단과 공군 창설로 이어졌다. 소련은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고 공군 지원에 대해선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북한은 일본군 출신을 최대한 활용해 자체적으로 공군을 기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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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한국군의 뿌리는 독립군이다'라는 슬로건이 난무하고 육사 교내에 독립운동가 5인의 동상이 세워지는 현상에 문제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지청천이 일본육사 출신인 것, 이범석이 제주4.3사건 진압을 총지휘했 던 것, 홍범도가 철저히 공산주의자였던 것 등은 모두 가린 채 단지 ‘독립활동’만 기리며 일부 사실을 전체로 강요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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