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허송세월

김훈, 585권

by 우보

감상


그의 글은 간결하다.


때때로 딱딱해 보일정도로 문장 구성이 단단하다.

반면 그 문장의 낱말 하나하나를 보면 부드럽다.


문장은 단단하지만, 그 구성은 부드럽게 써나갔다.

세상을 보는 그의 시선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과거의 아픔이 현재에도 반복된다.


역사는 퇴행하고, 슬픔은 다시 끌어올려진다.

그래도 그는 젊은이의 키스를 보며 희망을 느낀다.

일상의 기억을 세상과 연결한다.


어머니의 손수제비를 백제 장인의 흙 토기에 덧입힌다.

거기에는 '공감'이 흐른다.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글의 주변을 흐른다.

그들과 같은 식당, 같은 메뉴로 '대중 식사'를 한다.

그들이 마시는 소주를 마시며, '가난'보단 '가난함'을, '평등'보단 '평등함'을 이야기한다.


나이듦에도 진보적 시선을 유지하는 그에게서 변치않는 지지를 보내고 싶다.


아직도 세월호, 이태원, 노동자 죽음을 아파하는 그의 글에서 허송세월하며 자신을 한탄하지만, 한 순간도 허송세월하지 않았음을 안다.


이 책의 한 문장


사람은 지나가지만 사람됨은 지나가지 않는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본문에서 발췌


#

요즘엔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데, 가끔씩 술 마시던 날들의 어 수선한 열정과 들뜸이 그립다. 엉망으로 취한 다음 날 아침의 절망감이 혐오스럽기보다는 안쓰럽다. 저녁에 동네 술집에 모여 서 술 마시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나는 이 고해苦海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술은 멀어져 갔지만, 나는 아직 술을 끊은 것이 아니다. 나는 희망의 힘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이런 미완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돌면서 평생을 사셨는 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미안허다"를 남겼다. 한 생애가 네 음 절로 선명히 요약되었다. 더 이상 짧을 수는 없었다. 후회와 반성 의 진정성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것은 좋은 유언이 아니다. 평 생을 밖으로 나돌다가 임종할 때 "미안허다"라니 어쩌라는 것인 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었고 대책 없이 슬프고 허허로워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마을에 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김용택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김용택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 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 드려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유언은 건실하고 씩씩하고 속이 꽉 차 있다. 김용택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별것 아닌 것으로, 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 가볍게 받아들이셨다. 그리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인생의 당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

그날, 산소 정리를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더 이상 아버지 어머 니의 제사나 차례를 모시지 않기로 작정했다. 나는 아버지와 어 56 머니의 혼백을 땅에 의한 결박, 핏줄에 의한 결박, 모든 인연에 의한 결박 한 솥에 먹은 밥에 의한 결박과 이 세상의 비닐망에 의한 결박에서 풀어 드리기로 했다. 이것이 이제 늙은 나의 마지 막 예절이고, 어려서는 부모 속 썩이고 자라서도 변변치 못했던 아들이 부모에게 드리는 가장 좋은 자유의 선물일 것이었다. 아 내도 내 뜻에 동의했다. 이로써 내 부모의 혼백은 피조물의 모든 결박을 끊고 무와 공으로 돌아갔다.


#

나의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남의 죽음을 문상 다니 고 있다 말더듬증만이라도 온전히 간직하면서 병원 다니고 문 상 다니며 여생의 날들을 감당하려 한다.


#

사람이 울 때, 소리를 삼키고 눈물만 흘리는 억눌린 울음을'' 이라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슬픔의 형식이 드러나는 울음을 곡'이라 하고, 눈물도 흘리고 소리도 나는 그 중간쯤을 '체' 라고 한다는데, 이날 나의 마당에서 울고 간 새의 울음은 이런 어지러운 말을 모두 떠나서 몸 전체를 공명통으로 삼아 소리를 토해 내는 울림이었고, 이런 울림은 모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 이어서 자음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모음은 슬픔의 서사구조 를 용해해서 울림으로 울리게 하는데, 이 울림은 슬퍼하는 사람 의 마음을 맑게 하는 정화기능을 갖는다.


#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

나는 며칠 후 퇴원했다. 호수공원에 산책 나갔다가 두 다리로 걸음을 걷는 일의 복됨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 땅이 있어서 인간의 걸음을 받아 주었다. 꽃들이 피어 있는데, 창세기 때 핀 꽃을 이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내 옆에 꽃이 피어 있었구나. 이걸 모르고 먼 데를 헛되이 헤 매고 있었구나 살던 세상으로 돌아오길 잘했구나.


#

소설 <하얼빈>을 쓰면서 나는 이날 아침에 밝아 오는 어둠을 뚫고 달리는 하얼빈행 열차를 생각하면서 행복했다. 내 아버지 의 한강이 고통과 시련의 과거를 이끌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흘 러가듯이, 안중근의 열차는 약육강식하는 시대의 어둠을 뚫고 하얼빈으로 갔다. 이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의 아침에 청춘 은 아름답고 강력하다. 그들은 서른한 살이었다.


#

태풍전망대에서 내려올 때 내 마음속에서 자연과 역사는 극 심한 불화和로 부딪힌다 이처럼 크고 무서운 적대감의 뿌리가 대체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봉우리들이 신록으로 덮이고 또 백설로 덮여도 중무장한 적의의 진지들은 능선을 따라서 대치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으로 나의 산천예찬은 무색해진다. 이념의 깃발이 무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지층 아래 적개심은 날 마다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인가.


#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

나는 장비를 받으러 온 후배와 이처럼 식은 방귀 같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또랑또랑한 소리보다 헛소리가 더 평화로울 때가 많다.

나는 와인을 마시면 몸과 마음이 혼곤해진다. 와인에는 현실과 부딪치는 술맛의 저항감이 없다. 와인의 취기는 계통이 없다.


#

막걸리는 생활의 술이다. 막걸리는 술과 밥의 중간쯤 되는 자 리에 있다. 막걸리는 술을 밥 쪽으로 끌어당긴다.


#

비논리적이라는 점에서 막걸리와 와인은 같은 계층이지만, 막걸리는 생활적이고 와인은 몽환적이다. 인간에게는 그 양쪽이 모두 필요하다.


소주. 아아! 소주, 한국의 근대사에서 소주가 정신의 역사와 대중정서에 미친 영향을 사회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 능하다. 그 가공할 소비량에도 불구하고 소주는 아무런 아우라 를 갖지 않는다.


#

세월호가 침몰한 자리에 다시 가 봤더니 봄을 맞는 섬들이 아 지랑이 속에서 나른했고 수평선에까지 물비늘이 반짝였다. 바 다는 빛으로 덮였고 신생하는 시간의 미립자들이 물 위에서 춤 추고 있었다


#

공원에서 연꽃과 물고기를 들여다보면서 장자를 생각했다. 연꽃이 장자고 물고기가 책이었다 아름다운 것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 거꾸로 써도 마찬가지다. 내년 여름에는 또 새 매미가 울겠지.


#

살아있는 인간의 몸속에서 '희망'을 확인하는 일은 그야말로 희망적이다. 아마도 이런 희망은 실핏줄이나 장기의 오지 속과 근육의 갈피마다 서식하는 생명 현상 그 자체인 것이어서, 사유나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경험될 뿐이다. 몸의 희망을 몸으로 경험할 때, 우리는 육체성과 정신성의 간극을 넘어서는 행복을 느낀다. 나는 이런 행복을 '몸과 삶 사이의 직접성'이라고 이름 지으려 한다.


#

조선의 지리학자 신경준(1712~1781)은 말했다.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 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집과 길은 중요함이 같다. 길 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도로고道路考〉 중에서


#

나는 한국어로 문장을 쓸 때 주어와 동사의 거리를 되도록이 면 가까이 접근시킨다. 주어와 동사가 바짝 붙으면 문장에 물기 가 메말라서 뻣뻣해지지만 문장 속에서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선명히 알 수 있고, 문장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주 어와 동사의 거리가 멀면 그 사이의 공간에 한바탕의 세상을 차 려 놓을 수 있지만 이 공간을 잘 운영하려면 글 쓰는 자의 몸에 조사들이 숨결처럼 붙어 있어야 하고, 동사의 힘이 문장 전체에 고루 뻗쳐 있어야 한다.


#

자유, 평등, 해탈, 초월 같은 개념어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상 태는 형용사적 세계일 것이다. '가난함'을 '빈곤'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가난을 모른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겪는 삶은 빈곤poverty이 아니라 가난함being poor이고 차별받는 사람이 원하는 세상은 평등equality이 아니라 평등함being equal이다.


#

혼밥을 먹는 사내들은 혼술을 마신다. 혼밥에 혼술을 마시는 사내들은 거무튀튀하고 우중충하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저녁에 '고향'에서 혼술을 마시는 사내들의 술맛을 나는 안다. 소주는 면도날처럼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고, 몸속의 오지에까지 비애의 고압전류가 흐른다. 그 사내들의 창자에 스미는 김치찌개 국물과 돼지고기 한 점의 맛을 나는 안다. 그 국물 한 모금의 얼큰함과 고기 한 점의 육기가 창자에 스며서 비애의 모서리를 순화시켜 준다. 살아간다는 사업의 무망無과 회한 속에 서도 그 맛은 비애를 삭히고, 삶의 불씨를 잿더미 속에 잠재워서 보존한다. '고향'에서 혼밥을 먹을 때 나는 여러 혼밥꾼들과 길 게 앉아서 나의 혼밥을 먹지만, 나의 혼술 맛으로 다른 사내들의 혼술 맛을 헤아려 알 수 있고, 여러 혼술들이 이 술맛의 고압전류로 이어져 있음을 안다.


#

50여 년 만에 동네 먹자골목 식당에서 '대중식사'라는 네 글자와 그 아래 쓰인 차림표의 음식 이름들을 보았을 때 나는 눈이 번쩍 뜨이게 반가웠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사람 사는 일을 정면으로 들이받지 못하고 옆으로 피해서 모호하게 얼버무릴 때 '삶'이라는 편리한 단어를 끌어와 쓰는 꼴을 흔히 보게 되는 데 '고향' 식당의 '대중식사' 네 글자는 비켜갈 수 없는 삶의 현실을 내 눈앞으로 밀어붙였다. 노동시간과 임금이 싸우는 아귀 다툼 속에서, 날 저물면 허기지는 자연현상 속에서, '대중'이라 는 두 글자는 역동적으로 살아 있었다. '대중'과 '식사'가 합쳐 지면서 혼밥의 사적 경계는 뭉개지고, 혼밥 먹는 식탁은 광장으 로 넓어진다.


#

비가 오거나 춥고 바람 부는 날에 어머니는 늘 수제비를 만들 었다. 음산한 날씨는 가난을 더욱 발가벗기는 것이어서, 어머니 는 그 쓸쓸한 기운으로부터 식구들을 보호하려고 수제비를 만들었던 모양이다.


#

그 현수막 아래서 젊은이들이 키스를 했다. 젊은이들은 건널목에서 키스하고, 신호가 바뀌자 길을 건너갔다. 이 썩어빠진 현수막 아래서 키스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나는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

배 안에서 스물두 살 정약용의 마음은 학문에서 신앙으로 넘 어가는 문지방에 올라서 있다. 정약용은 멀어서 끝이 안 보이는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정약전은 이날의 일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정약전도 배 안에서 이벽이 보여 주는 그'한 권의 책'에 빠져들었고, 이해 겨울에 이승훈으로부터 세례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 '한 권의 책'은 젊은 그들의 운명에 깊이 닻을 내리 고 있었다.


#

이승훈의 죽음의 형식에는 순교殉敎와 배교背敎가 합쳐져 있다. 그는 고문과 순교의 과정을 배교로 마감하고 참수되었지만, 그 의 최후의 내면이 배교인지 순교인지는 달레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만이 아신다.


#

아득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형제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강진과 흑산의 어부들이 이 편지를 전해 주었다 두 형제가 자신 의 유배지가 더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편지로 다투는 문장들은 아름답다. 흑산의 정약전은, 흑산이 강진보다 더 살기 좋은 고장이므로 약용의 죄가 더 가볍다고 해서 강진으로 보내고, 자신의 죄가 더 무겁다고 해서 흑산으로 보낸 것은 공정한 처분이 아니라고 말했다.


#

하얼빈역의 거사 후 계속된 신문과 재판의 과정에서 일본인 검찰관과 재판관은 안중근의 '살인'을 '신앙'에 대한 배반으로 몰고 가서 안중근의 양심상의 정당성을 파괴하려고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첫 번째 공판(1910년 2월 7일)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물었다.


마나베 그대는 그날(1909년 10월 26일) 아침 떠날 때 신에게 기 도드렸는가?

안중근 나는 매일 아침 기도를 하고 있다.

마나베 그날 아침에는 이토 공을 죽이기 위해 기도드린 것은 아닌가?

안중근 새삼스럽게 기도를 올릴 까닭은 없다.


#

미조부치는 신문의 방향을 돌려서 안중근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찔렀다.


미조부치 그대가 믿는 홍 신부(빌렘)가 이번 범행 소식을 듣고 자기가 세례 준 사람 중에서 이런 사람이 나온 것은 유 감이라면서 한탄했다고 하는데, 그래도 그대는 자신 의 행위가 사람의 도리와 종교의 취지에 반한다고 생 각하지 않는가?


미조부치는 안중근의 신앙적 정당성을 교회의 제도적 가르침과 성직자 우월이라는 현실의 벽 앞으로 몰아붙였다. 미조부치의 신문 기술은 마나베보다 윗길이다. 안중근은 이 신문에 답변하지 않았다. 재판을 기록하는 서기 는 "피고인은 묵묵히 답변하지 않았다"라고 조서 말미에 썼다. 안중근에 대한 모든 기록들 중에서 나는 일본인 서기 다케우치 가츠모리가 쓴 이 짧고 메마른 문장 한 줄을 특별히 좋아한다.


#

강운구의 인물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3인칭 문장 쓰기의 어려움을 생각했다. '나'를 주어로 문장을 쓸 때는 정직하기가 어렵고, 또 반대로 정직을 내세워 뻔뻔스러워지지 않기가 어렵고, 수다 멀지 않기가 어려운데, '그'를 주어로 문장을 쓰자면 '나’로부터 '그'로 건너가기가 어렵다.


#

사람은 지나가지만 사람됨은 지나가지 않는다. 짓밟히고 억눌린 시대에도 사람은 사람다운 표정과 체취와 온도를 지니고 있었고 억압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의 그때'를 '사람의 지금' 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

이 불완전성은 세계의 본래 스스로 그러한 운명이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의 혹은 이념의 깃발을 들고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땅 위를 걸어 다니는 자들은 어리석다. 이 세계의 불완전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그 불완전성을 해결할 수 없지만 그 불완전성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은 세계와 인간을 대하는 마음에서 겸손과 수줍음과 조심스러움을 갖출 수 있다. 겸손과 조심스러움을 상실한 태도가 이 불완전한 세계 위에 지옥을 완성한다. 이 지옥의 이름은 파시즘이다.


#

공자는 이 발가벗은 일상성에 바탕을 두고, 언어와 삶이 서로 배반하지 않는 세계를 향한 인간의 소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 습니다. 그의 말본새는 맑고 단순했는데, 그의 메시지가 인류사에 울리는 강력하고도 생생한 호소력은 이 단순한 어조에 바탕해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명화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소통 불가능한 언어의 창궐입니다. 지금, 언어는 소통에 기여하 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

햇볕 속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저물어서 집에 돌아오면 엄마는 "네 머리통에서 햇볕 냄새가 난다"라고 말했다. 햇볕에 냄새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엄마의 말을 믿었다.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내가 개천가나 무너진 옛 성터에 올라가서 놀때 땅에서도 햇볕 냄새가 났다.


#

냄새도 음과 같아서 그자체 안에 희로애락이 들어 있지 않지만, 냄새는 인간의 생애와 정서에 깊이 간여한다. 오감 중에서 가장 동물적이고 원시적이다. 냄새는 기호화할 수 없고 개념화할 수 없고, 구조나 조직으로 계통화할 수 없다. 그래서 냄새는 사상이나 예술이 되지 않는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냄새는 내 생애의 냄새이고, 내가 살아온 시간의 냄새다.


후각이 시들어 갈수록 냄새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살아나서, 이제는 주저앉으려 하는 나를 다시 온갖 냄새가 뒤섞인 삶 속으로 밀어낸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1화과학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