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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김훈, 587권

by 우보 Feb 02. 2025

감상

이 책은 천주교에 대한 책이다. 

천주교로 인해 벌어졌던 박해를 여러 사람의 모습을 살핀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조카사위 황사영, 관련되어 죽어간 여러 계층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 <자산어보> 속 정약전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설경구 배우가 잘 표현했다.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배교함으로 살아남아 훗날을 도모했다. 

실학자라는 이름으로 후에 포장되었지만, 그들도 살아남아야 했던 조선의 사대부였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깨달았던 사실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면, 황사영도 나라를 바치려고 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황사영은 천주교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뒤엎어 달라고 북경의 주교에게 간청한다. 이미 조선이 망하기 100년 전에도 그 나라의 희망 없음을 알았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적 사실 또는 논쟁의 한복판에 있지 않다.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연약하고 부러지기 쉬운 이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스스로 자산으로 만든 흑산에서 살아야 했던 정약전의 모습이나,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여러 천주교인의 모습들이 그렇다. 


한낫 선원인 문풍세라는 가상의 인물의 말에서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나오는 듯하다. 


 '너는 무죄다.라고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사람은 본래 무죄인 것이었다.'



이 책의 한 문장

나는 흑산을 자산으로 바꾸어 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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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거기서 끊어졌다. 고통은 뒤집히고 또 뒤집히면서 닥쳐왔다. 정약전은 육신으로 태어난 생명을 저주했지만 고통은 맹렬히도 생명을 증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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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는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았고, 그 너머라는 흑산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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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바다에서는 새들은 날지 않았다. 바다는 다만 하늘과 닿은 물일 뿐이었는데, 흔들리는 물 위에 햇빛이 내려앉아서 바다에서는 새로운 시간의 가루들이 물 위에서 반짝이며 피어올랐다. 천주가 실재한다면 아마도 저와 같은 모습일 것인가를 정약전은 생각했다. 바다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상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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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그렇게 있을 수 없는, 물과 하늘 사이에 흑산은 있었다. 사철나무 숲이 섬을 뒤덮어서 흑산은 검은 산이었다. 멀리서부터 검푸른 숲이 뿜어내는 윤기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바람에 숲의 냄새가 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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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앞강이 큰 공부이옵니다.

라고 말했을 때 정약현은 웃으면서 사위의 손을 잡았다. 임금이 잡았던, 어린 진사의 오른손이었다. 그때의 웃음이, 아마도, 정약현의 생애에서 가장 큰 웃음이었다.

-자네가 이 마을 강을 알아볼 줄 내 알았네. 마음이 깨어 있지 않으면 경서가 다 쓰레기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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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안을 때, 마음의 기쁨과 몸의 기쁨이 합쳐져서 조바심치는 일은 꽃이 피고 해가 뜨고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을것이라고, 먼저 잠든 명련 곁에서 황사영은 생각했다. 그것이 처숙부 정약종이 가르쳐준 대로, 천주의 증명이며, 그 증명이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드러나는 것이 천주의 권능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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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은 묻지 않는 창대를 편하게 여겼다. 창대는 섬의 사람이었고, 여기의 사람이었다. 서울과 권세를 묻지 않더라도, 삶은 가능할 것이었다. 창대의 얼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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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죽은 정약종과 가을에 살아남은 정약용은 똑같이 단호했다. 둘은 정약전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서 이 세상 너머를 엿보았다. 그때 세상의 근원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둘은 제 갈 길을 갔다. 정약종은 그 너머로 갔고 정약용은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돌이키지 않았다. 형틀에 묶여서, 두 동생과 조카사위 황사영의 맑은 얼굴을 생각하면서 정약전은 기진맥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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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종이 사학의 죄를 끌어안고 먼저 죽어서 약용은 풀려나기가 수월할것이었다. 약용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약용은 자신이 약종의 죽음에 기대고 있음을 알았다.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알게 되었다. 정약전은 약용의 배교에 힘입어서 함께 풀려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약전도 알려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알게 되었다. 정약전은 약종과 약용으로부터 비켜서 있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죽은 약종과 황사영의 일을 평생 입에 담지 않았다. 그들은 형틀에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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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대는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을 대답하지 않았고 다만 들여다보았다.

창대의 아버지 장팔수가 배를 타고 나가서 가까운 바다에서 주낙질을 하고 있을 때도 창대는 신당 언덕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약전은 가끔씩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장팔수의 배는 물결 사이에서 가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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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떼가 방향을 바꿀 때, 수면에는 물이랑이 일었고 늙은 어부들은 물이랑이 주름 잡히는 쪽을 바라보면서 고등어의 향방을 가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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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살자. 여기서 사는 수밖에 없다. 고등어와 더불어, 오칠구와 더불어 창대와 장팔수와 더불어, 여기서 살자. 섬에서 살자.

울음 같은 말들이, 말에 미달한 채로 정약전의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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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풍세는 옥섬의 죄인들이 모두 무죄임을 알고 있었다. 너는 무죄다. 라고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사람은 본래 무죄인 것이었다. 그 무죄한 자들을 데려오는 길은 멀고 또 멀어서 아무도 갈수 없는 바다를 건너가는, 먼 길을 가는 자의 소임일 것이라고 문풍세는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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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이 자리에 없을 때 일꾼들이 이죽거렸지만 순매는 못들은 척했다. 섬에 유배 온 죄인의 핏줄로 태어나서 남편을 바다에서 잃고 다시 유배 온 죄인에게 개가하는 팔자가 순매는 쓰라렸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쓰라림은, 거기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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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수 없는 자리에서 정약전은 눌러 앉아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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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은 창대를 불러 앉히고 그 두려움을 말하려는데, 말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흑산을 자산으로 바꾸어 살려 한다.


정약전은 종이에 검을 자를 써서 창대에게 보여주었다. 창대가 고개를 들었다.


-같은 뜻일 터인데…………….


-같지 않다. 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혹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바꾸시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흑은 무섭다.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라는걸 끊임없이 깨우친다. 자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 바다의 물고기는 모두 자산의 물고기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


-그쪽이 편안하시겠습니까?


창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약전은 자산 바다의 물고기들의 종류와 생김새와사는 꼴을 글로 적어나갔다. 글이 물고기를 몰아가지 못했고, 물고기가 글을 끌고 나갔다. 끌려가던 글이 물고기와 나란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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