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로벨리, 589권
감상
이 책을 읽다보면 뇌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나름대로 머리가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시간은 하나의 층이 아니라 광원뿔 속 각자의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 찰나의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그렇게 시간을 파악했다.
시간은 같게 흐르지 않는다.
평지와 산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산은 느리게 평지는 빠르게 흐른다.
커다란 사물에 가까이 있을수록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는 것이다.
시간은 기억 속에 있고, 사건이란 시간들의 조합이며, 사물들은 시간이다.
때때로 측정하는 시간은 또한 양자화되어 작게 나누어진다.
무척 어려운 표현들이다. 내가 쓰면서도 이 말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착시일 뿐이라고.
부처는 말했다. 시간은 고통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시간은 뇌 속에 박힌 기억의 흔적이다.
세 사람 모두 동의한 것이 있다면 시간은 우리 안에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같은 층의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개인이 광원뿔의 시공간에 살아갈 뿐이다.
무지개를 보고 무지개가 있는 곳에 갔을 때 무지개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시간이라는 표현이 좋다.
음악을 들을 때 시간이라는 순간을 느낄 수 있다. 음악은 과거의 음과 미래의 음 사이에 현재의 음이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도 좋았다.
이 책의 한 문장
공통적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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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구조를 변경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앞에서 설명한 시간의 지연을 뜻한다. 모든 물체는 자기 주위의 시간을 더디게 한다. 지구도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주위의 시간을 늦춘다. 평지에서 시간이 더 많이 지연되고, 산에서는 덜 지연되는 이유는 산이 지구의 중심과 좀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평지에 사는 친구는 덜 늙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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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연은 그 자체를 관찰하기 어렵지만, 물체를 떨어지게 하고 우리가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게 하는 등 눈에 보이는 영향을 끼친다. 두 발이 바닥에 붙어 있다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으로 온몸이 이동하고 있다는 뜻으로, 이때 발 쪽의 시간은 머리 쪽의 시간보다 더 천천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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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요동은 카드 한 묶음이 계속 섞이는 것과 같다.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던 카드들을 뒤섞으면 무질서해진다. 이렇게 열은 (분자들의) 뒤섞음에 의해 뜨거운 쪽에서 차가운 쪽으로 이동할 뿐 그 반대로는 이동하지 않는다. 자연의 무질서가 증가한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친숙하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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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현재'의 개념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해야지, 멀리 있는 무언가를 대상으로 하면 안 된다.
우리의 '현재'는 우주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현재는 우리와 가까이에 있는 거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 거품의 적용 범위는 얼마나 될까? 이는 우리가 시간을 얼마나 정확하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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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간의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은 화성은 15분, 프록시마는 8년, 안드로메다 은하는 수백만 년에 이른다. 이 간격은 현재의 확장이다. 아마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것들 중 가장 거대하고 이상한 발견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우주 곳곳에 잘 정의된 '지금'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환상이자 우리 경험의 부적절한 외삽挿이다. 비유하자면 무지개가 닿은 숲의 한 지점처럼, 직접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보러 가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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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공통적인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공간의 시간 구조는 그림 3-8과 같은 시간의 층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모든 광원뿔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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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아인슈타인은 대학에 자리를 얻기 전에 스위스 베른의 특허사무소를 다녔다. 그가 여기서 기차역들의 시계 조율과 관련한 특허 업무를 담당했던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시계를 조율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곳이 바로 그 특허사무소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시계의 동기화를 받아들인지 몇 해 되지 않았을 때 아인슈타인은 시간의 정확한 동기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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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장이라는 실제적인 구조가 존재하고 이것이 다른 물리학과 동떨어지지 않으며, 세상이 그냥 한번 흘러 지나가는 무대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중력장은 다른 것들과 상호 작용을 하면서, 우리가 미터기나 시계라 부르는 것들의 리듬과 모든 물리적 현상의 리듬을 정하는, 이 세상의 위대한 춤을 구성하는 역동적인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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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로 측정한 시간은 '양자화'된다. 다시 말해 특정한 값만 취하고 다른 값들은 없는 것이다. 시간을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알갱이로 나뉜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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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양자화'는 시간의 거의 모든 값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정확한 시계로 시간 간격을 측정한다면, 측정된 시간은 오직 몇몇의 분리된 특정한 값만을 취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간격은 연속적이라 생각할 수 없다. 균일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캥거루처럼 한 값에 다른 값으로 껑충 뛰어넘는, 불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시간의 '최소' 간격이 존재하는데 이 간격 이하로 내려가면, 가장 기본적인 의미에서 보더라도 시간으로서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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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사물'의 전형은 돌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맛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단위는 공간의 특별한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뿐 아니라 '언제'에도 있다. 그것이 바로 사건인데, 그들은 공간은 물론 시간적인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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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양자 사건들의 방대하고 무질서한 그물이다. 깔끔한 싱가포르보다는 어지럽고 지저분한 나폴리와 비슷하다.
'시간'이 그저 사건을 뜻하는 것뿐이라면, 모든 사물은 시간이다. 시간 속에 있는 것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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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에 대한 영원주의적 사고방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이 어느 편지에 쓴 유명한 문장을 자주 언급한다.
물리학을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은 집요하게 계속되는 착시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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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변화가 있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들에는 시간 구조가 있다. 이 시간 구조는 환상이 아닌 어떤 것이다. 세계적인 사건도 아니다. 단일한 세계 질서로 설명될 수 없는 지역적이고 복합적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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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시간의 경과는 언제나 상호작용하는 그리고 상호 작용과 관련된 물리적 체계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건들에 대한 완벽한 지도를 그릴 수도, 완벽한 기하학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세상은 서로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관점들의 총체와 같다. '외부에서 본세상'은 난센스다. 세상에서 벗어난 것이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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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거는 지난 것이라 더 이상 없고 미래는 앞으로 와야 할 것이라 이것 역시 없기 때문에 우리가 언제나 현재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언제나 현재에만 있다면 그것은 정의상 순간적인 것이 되는데 어떻게 기간을 인식할 수 있는지, 혹은 평가할 수 있는지를 자문했다. 우리가 언제나 현재에만 있다면 어떻게 과거에 관해 이렇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걸까? 지금 이곳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 과거와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가 내린 결론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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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속에서 현재만 본다. 과거의 '흔적'이라고 해석되는 것들은 볼 수 있지만, 과거의 흔적을 보는 것과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차이의 근원이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일이 내면적이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그것은 내면의 일부이며, 뇌에 남은 과거의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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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것을 갖게 되고 그것에 집착했다가 결국은 잃게 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어떤 것을 시작했다가 결국은 끝나기 때문에 고통이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과거에 혹은 미래에 있지 않다. 지금 여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우리의 예측 속에 있다. 우리는 영원불멸을 갈망하고 시간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한다. 시간은 고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