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디지털 시대인 요즈음도 양반문화를 내세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가끔 느낀다. 자신은 oo김 씨 몇 대 손, oo권 씨 몇 대 손이라고 은근히 집안 자랑하는 친구들이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마디 한다. 너는 김 씨나, 권 씨가 아니라고. 단지 아버지가 김 씨라고 하니까 김 씨인 줄 알고, 권 씨라고 하니까 권 씨일 뿐이라고. 그러면 친구는 금방 말귀를 알아듣는다. 사실 그렇다. 내가 김 씨이고 아내가 오 씨인 우리 부부 DNA를 살펴보면 금방 그 뜻을 알 수 있다. 내가 진짜 순수한 김 씨라고 해도 수천 년 수백 년 동안 수많은 DNA가 섞어져 김 씨 고유의 DNA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오 씨 성도 마찬가지다. 오 씨 고유의 DNA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나와 아내가 순수한 김 씨와 오 씨라는 것을 가정하고 아래로 내려가 보자. 순수 김 씨 100%인 나와 순수 오 씨 100%인 아내의 피를 물려받은 우리 아들은 나와 아내의 DNA를 50%씩 물려받는다. 아들이 결혼하여 손자가 생기면 그 손자는 25%, 또 증손자는 12.5%,. 고손자는 6.25%, 현손자는 3.125%의 DNA를 물려받게 된다. 모두 다른 피는 섞이지 않은 순수혈통만 전해진다고 가정해도 5대까지 내려가면 김 씨나 오 씨의 DNA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유림에서는 족보를 앞세워 혈연관계, 특별히 성씨(가문)를 중요시하고 있다. 세계의 그 많은 나라 중에서 족보를 내세우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이스라엘 정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족보의 옳고 그름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사실상 혈연관계는 족보보다 가족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봤을 때 위로 3대(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와 아래로 3대(자식, 손주, 증손주)가 그나마 자신과 비슷한 DNA를 보유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부부 중심의 핵가족에 머물러 있음을 볼 때 앞으로 친인척 개념도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성씨의 세습도 그렇다. 가부장적인 최근까지는 일방적으로 아버지의 성씨를 세습했지만, 개정 민법은 부모 중 하나의 성씨를 선택할 수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모계의 성씨를 세습한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손자 손정인이가 3학년 때 성씨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자신은 아버지 성씨인 손 씨를 사용하고 있지만 어머니 성씨인 김 씨를 써도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앞으로는 김정인이라고 부를까?’라고 했더니 그건 싫단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손정인이라고 불렀는데, 갑자기 김정인이라고 하면 친구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내 손자이지만 참으로 기특하다.
나는 어렸을 때 친척이라고 하면 조부모 백 숙부 외삼촌 이모 정도가 전부였다. 어떤 친구들은 당숙 당숙모라는 말을 가끔 하면서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얘기하는 걸 보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나에겐 당숙이라는 친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모나 고모부도 없었지만, 고모는 아버지의 여자 형제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부모의 사촌 형제가 당숙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어느 정도 가까운 친척인지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아버지의 사촌은 가까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당숙을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함께 어울리고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데 사실 아버지의 사촌 형제들은 멀리 아버지의 고향에 떨어져 살고 있어서 내가 직접 만나거나 본 적은 없다. 그러다 보니 내 머릿속에 당숙이라는 개념이 자리할 수 없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 때 우리 할아버지는 자식들 교육 등 목적으로 고향 집 전답을 대충 정리하여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지방 중소도시로 이주하셨다. 100여 전 당시엔 삶의 터전이 시골 농촌이었기 때문에 전 가족이 도회지로 이사한다는 건 그다지 쉬운 선택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도시에서 뾰족한 생계 수단이 없었던 우리 할아버지는 일본인으로부터 생과자 만드는 기술을 습득하여 이른바 과자점을 운영하셨다. 그 뒤 백부와 아버지가 대를 이어 과자를 만들어 판매하며 생활했다. 생과자를 일본어로 ‘나 마가시’(生菓子)라고 하는데, 수분이 많은 주로 팥소를 사용한 과자와 크림이나 과일 등을 이용하여 만든 양과자를 말한다. 덕분에 난 어렸을 때 생과자를 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지방 중소도시에 생활 터전을 잡은 우리 아버지 형제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6.25 전쟁과 혼란기 동안 먹고사는 문제로 바빠 고향 방문이 힘들었다고 한다. 고작해야 설날이나 추석 명절에 아버지 형제끼리 고향 방문하는 것이 전부였고, 고향을 다녀온 아버지로부터 사촌들을 만났다는 얘길 들었다. 그분들이 나에겐 당숙이지만 난 만난 적도 본 적도 없어서 당숙의 의미를 지금도 잘 모른다. 아버지 형제는 5남 1녀, 그중 맏이가 고모이다. 고모는 구한말 태생으로 경기도 평택에 살았기 때문에 당시엔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아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다. 영어 속담에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듯이 자주 만나는 친척들은 촌수 여부를 떠나서 가깝게 느껴지고, 만나기 힘든 친척들은 머릿속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음을 몸소 느꼈다. 그래서 예로부터 ‘먼 곳에 사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라는 이웃사촌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이웃사촌이란 말을 실감한다.
농경사회에서 공업화 산업화로 진행된 현대사회는 친인척 개념이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대가족에서 소가족과 핵가족, 다시 1인 가구로 사회가 급변하고 있다. 요즈음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을 미혼(未婚)이라는 말보다 비혼(非婚)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미혼은 혼인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을 전제하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보다 주체적 의미에서 비혼이라는 말을 여성학계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모 형제와도 점점 관계가 멀어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트렌드의 변화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우리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인 1980년대 초경 우리 아들과 딸은 종친회에 얼마간의 돈을 납부하고 족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태어난 조카들이나 손주들은 지금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종친회 사람들과 실질적인 왕래가 없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라도 종친회 사무실을 방문하여 당숙의 후손들인 재종형제들을 만난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중간자 위치에 있는 우리 또래들은 나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다. 족보를 중시하는 가문이나 혈연을 무시하고 핵가족을 중심으로 한 디지털 시대의 이웃사촌을 앞세우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이웃사촌도 좋지만, 더 늙기 전에 동생이랑 둘이 조부모와 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해 당숙들의 후손들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