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 일출(船上 日出)

국민통합

by 동천 김병철

나는 어려서부터 아침 운동이 몸에 배어 있어 요즈음도 수시로 집 근처 공원에서 아내와 함께 아침 산책을 즐기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매일 신정여자상업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우리 가족끼리 간단한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한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지금은 아들딸 모두 결혼하여 각자 따로 살고 있지만, 어렸을 때 운동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어 변함없이 열심히 스트레칭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기분이 좋다. 규칙적인 생활을 항상 강조해 온 나로서는 자식들이 부모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아서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요즈음 우리 부부가 아침 운동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 중 양천공원 농구장 근처 ‘운동공간’이라는 곳에 모여서 오버헤드풀리머신, 로라맛사지머신, 어깨근육풀기, 허리돌리기, 역기, 철봉 등 기구를 이용하는 70대 남자 어르신들에게 관심이 많다. 왜냐하면 그 어르신 대여섯 명은 아침 6시경 하나둘 모여 함께 운동하고, 7시 15분쯤 어김없이 돌아가는데 자기네들끼리 주고받는 대화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화젯거리는 전날 매스컴에 오르내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등을 망라하고, 거기에다가 자신들의 개인적 의견을 덧붙여 대화를 진행한다. 운동을 하는 건지, 잡담하러 나온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화는 언제나 진지하지만 언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날 화젯거리에 각자의 생각을 말하고 자신의 주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끝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어르신들 옆에서 운동하면서 저절로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를 듣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나 사회 상식을 넓혀가는 재미를 본다.

며칠 전에는 세월이 너무 빨리 간다고 이구동성으로 한탄하는 어르신들 모습이 자못 진지했다. 임인년(壬寅年) 새해 첫날 일출을 보고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4월도 다 가고 5월이 코앞이라며 푸념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5월이 되어 새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면 금년도 다 갈 것이라는 그분들 얘기로는 세월이 자기 나이와 같은 속도로 빠르게 지나간단다. 60대는 시속 60km, 70대는 시속 70km로 가는 세월이라고.

어르신들 얘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우리 가족의 새해 일출 맞이가 생각났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새해가 밝아오면 사람들은 지난해의 묵은 때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자 하는 뜻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일출 명소를 찾는다. 매일 어김없이 떠오르는 똑같은 태양이지만 새해 첫날 일출은 왜 남다른 느낌이 드는지 알 수가 없다. 나도 젊었을 땐 강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곤히 잠든 처자식을 깨워 새벽 일찍 일출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 동네 용왕산과 매봉산, 서울 근교 관악산, 멀리는 지리산 천왕봉, 그리고 남해 여수의 향일암과 동해 정동진의 일출 등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코로나-19’로 인해 여기저기 지자체에서 실시하는 각종 행사가 대부분 취소되어 가족 단위나 개인적으로 일출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 가족이 그동안 다녀왔던 일출 명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의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선상에서 바라본 일출이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 모두 처음으로 경험한 선상 일출이었고, 무엇보다도 아들이 바라던 고등학교에 입학한 기쁨과 가족은 한배에 탄 선원이라는 일체감이 우리를 더욱 흥분시켰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 중순 내가 일본 교토에서 공부할 때 겨울방학을 이용해 처와 아들딸이 방문했다. 서울의 외국어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한 아들이 만나자마자 갑자기 내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니까 새로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선상 일출이 보고 싶단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선상 일출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머나먼 타국 일본에서 선상 일출을 본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지인을 통해 여기저기 알아본 후, 일본인들과 함께 가는 패키지 상품을 예약했다. 밤늦게 고베항(神戶港)을 출항한 점보 페리가 밤새 항해하는 동안 승객들은 선실에서 잠을 자고, 페리가 다음 날 아침 시코쿠(四國)의 다카마쓰항(高松港)에 도착할 무렵 선상 일출을 감상하는 패키지 상품이다. 혼슈(本州)와 시코쿠를 잇는 세토오하시(瀨戶大橋)를 자동차로 간다면 1,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리지만, 꼬박 하룻밤을 배 안에서 가족끼리 오순도순 얘기를 주고받고 함께 잠을 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들에게는 입학선물, 가족에게는 새해 선물로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타보는 대형 페리에는 식당이나 오락실, 간단히 술을 마실 수 있는 스탠드바나 매점 등이 잘 갖춰져 있는 이른바, 바다를 질주하는 호텔이었다. 우리 부부가 스탠드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들 지현이는 자판기에서 먹고 싶은 과자나 음료수를 맘껏 꺼내먹는 것에 재미를 붙였고, 딸 소현이는 인형 뽑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등 모든 것이 신기한 듯 배 안 곳곳을 살피고 돌아다니다가 지치고 피곤할 즈음 가족실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설치면서도 선상에서 새해 일출을 볼 수 있다는데 들떠있었고, 그것도 먼 타국 일본의 태평양 바다에 떠오르는 색다른 일출에 가족 모두 한마음으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누구의 심술인지 몰라도 새벽하늘엔 별이 보이지 않고 먹구름만 잔뜩 끼어있었다. 날씨가 흐려 일출 보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가이드의 말에 우리는 그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선실과 갑판을 오가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일출 시각은 이미 지나고 있었다. 모처럼 가족끼리 즐겨볼 일출을 누군가가 시샘하면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할 무렵 갑자기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구름을 박차고 붉은 기운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선상의 모든 사람은 짧은 탄성을 지르며 새해 일출을 보고 흥분했다. 구름을 뚫고 솟구친 일출이 한층 더 찬란해 보였고,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태양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사람, 가족끼리 친구끼리 손을 맞잡고 방방 뛰는 사람, 혼자서 무슨 생각에 잠겨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태양을 바라보는 사람, 열심히 사진 찍는 사람 등 각양각색으로 일출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가족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손을 맞잡고 한동안 멍하니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기념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나는 붉은 태양을 향해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었다. 아내와 아들딸도 새해 첫날 태양을 마주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지금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가족 4명이 한배에 타고 똑같은 시간에 일출을 보고,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는 것이다. 한배에 탄 가족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각자 빌었던 소원은 비슷하기도 하고, 조금씩 달랐을 것이다. 우리 가족, 특별히 아들딸을 생각하면 함께 했던 아침 운동과 25년 전 세토나이카이 선상 일출이 내 맘 깊은 곳에 아직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 아들딸이 이제는 장성하여 우리 부부에게 손주들을 선물해 주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 정인이가 지난 제20대 대통령 선거 때 ‘할아버지는 어떤 후보가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다. 내가 일부러 특별히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다고 하자, 정인이는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엄마는 L 후보가 제일 좋다고 하고, 아빠는 가족이라도 비밀이라며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에 안 사실이지만 아들 내외는 L 후보를 제일 싫어하고, Y 후보를 좋아한단다. 한 가족이 같은 선상에서 새해 일출을 보며 빌던 각자의 소원이 비슷하기도 하고 달랐듯이 아들딸이 내 자식이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호불호가 더욱 확실히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아들딸 의견이 서로 다르고, 또 부모인 우리 부부도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서로 생각이나 의견이 다를 뿐이지 결코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도 그러한데 남남끼리야 오죽 서로 다를까? 혹자는 말한다. 국민은 한배에 탄 사람들이라고.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 할 것 없이 한배에 탄 사람들이다. 항해가 원만할 때는 별소리 없겠지만, 폭풍우가 몰아치고 거센 파도에 휩쓸려 앞이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불안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키를 잡은 선장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안전 항해에 충분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장을 보좌해야 할 항해사나 기관장, 갑판원 등 선원들 한 사람 한 사람 선임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한배에 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선장을 믿고 따를 테니 말이다.

대선이 끝난 요즈음에도 내 아들딸처럼 호불호를 확실히 말하는 사람들이 많고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대선은 끝났고, 새로운 선장이 ‘대한민국호’의 키를 잡고 우렁찬 뱃고동을 울리면서 항해를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되, 한 곳에 마음을 모으는 것이다. 아울러 키를 잡은 선장이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잘 항해할 수 있도록 선장에게 힘을 몰아주고 기다릴 줄 아는 참을성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선장이 마음 놓고 멋진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한배에 올라타기 전에는 탈 건지 말 건지 갈등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한배에 탔다면 원만한 항해에 방해되는 일을 삼가고 선장을 믿고 따라갈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 가족이 먹구름으로 인해 선상 일출을 포기했지만, 어느 순간 구름 사이로 솟구쳐 오른 붉은 태양을 보면서 각자 소원을 빌고 그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 새로 출범하는 새 정부의 안전 항해를 위해 한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멋진 우리나라, 우리 국민이기를 바랄 뿐이다.

2022년 5월 10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과 북핵 문제, 그리고 고물가·고환율·고금리 등 안보와 경제 삼중고의 먹구름을 안고 출항한 “대한민국호”가 안전 항해를 할 수 있도록 흩어진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지혜가 필요할 때이다. 그러다 보면 예상치 못한 한순간 먹구름을 박차고 솟구치는 멋진 선상 일출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 대한민국호‘에 함께 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어려운 대내외 환경 속에서도 멋진 선상 일출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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