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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Feb 05. 2024

이름 없는 고양이

이름을 불러주는 일에 대하여


  동네에 부쩍 길고양이가 많아졌다. 집 근처뿐만 아니라 골목이나 식당 구석에서 종종 마주친다. 동물을 좋아하는 딸은 길고양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안쓰러운 마음에 주변을 서성인다. 엊그제 놀이터에서 아기 고양이 두 마리를 발견했다. 저녁 내내 걱정하다 결국 고양이 가족이 사는 하수구 구멍을 살피러 나왔다. 춥진 않은지 혹시 누가 괴롭히지 않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날 이후 아이는 매일 고양이를 보러 갔다. 자주 가다 보니 만날 수 있는 시간대도 알게 되었다. 멀리 떨어져 앉아 일광욕하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아이. 한낮의 평화로운 시간. 뒹굴거리는 고양이를 행복한 얼굴로 바라보는 딸과 그 모습을 귀여워하며 지켜보는 나. 머리 위로 햇빛이 부서지듯 쏟아지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노곤해져 잠이 올 것 같았다.


  고양이의 존재를 우리만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작은 접시에 세모 모양 사료를 챙겨주고, 스티로폼으로 구멍을 덮어 바람을 막은 흔적이 있었다. 돌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산책길에 고양이의 안위를 살피는 정도였으니까. 고양이를 보러 가는 일은 딸에게 특별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이름도 붙여주고 말을 걸기도 했다. 회색이와 얼룩이. 털 색깔에 맞춰 아이가 만든 이름이다. 천천히, 조심스레 고양이에게 다가가는 나른한 오후. 그 눈빛에는 설렘과 행복이 가득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지키며 고양이는 고양이의 시간을, 아이는 아이의 시간을 보냈다.


  실컷 고양이를 보고 돌아온 딸이 책 하나를 꺼낸다. 다케시타 후미코 작가의 <이름 없는 고양이>라는 책이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초록색 눈을 가진 고양이가 주인공이다. 동네 모든 고양이에게는 이름이 있고,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름 없는 고양이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이름을 가져본 적 없다. 어느 날 절에 사는 고양이가 제안한다. 직접 이름을 지어보는 게 어떠냐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단어를 찾아보지만 쉽지 않다. 그러다 깨닫게 된다. 자신이 바란 것은 이름이 아니라는 걸.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유명한 시가 떠오르는 책이다. 이름 없는 고양이는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거는 여자아이를 만나는 순간 알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는 다정하게 자신을 불러주는 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초록눈의 고양이는 아이가 붙여준 '멜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난다. 멜론은 아이에게, 아이는 멜론에게 꽃이 되었다. 이름 있는 고양이가 되어 아이와 함께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길에서 만난 수많은 고양이들을 떠올렸다. 마주친 고양이의 특징에 맞게 귀여운 이름을 붙여주던 아이. 고양이를 만난 장소와 특징과 이름을 적어둔 아이만의 고양이 도감도 있다. 딸에게는 다정한 마음이 있었다. 아무도 반가지 않는 길고양이라도 이름을 붙여주고, 잘 지내는지 둘러보고, 고양이 도감에 기록하며 기억하는 따뜻한 마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고양이와 아이 사이에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는 것 같았다. 서로 다른 존재에게 이름이란 서로의 틈 사이에 스미는 온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들은 겨우내 부지런히 자라서 어디론가 떠날 것이다. 아이도 이 동네를 떠나 봄에는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모든 걸 다 잊고 살다가도 문득, 햇빛 쏟아지던 평화로운 오후를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아이가 다정히 이름을 부르던 순간. 귀를 쫑긋하며 아이를 바라보던 고양이를 발견하던 순간. 모든 순간은 우리에게 하나의 그림처럼 남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작은 수첩에도 회색이와 얼룩이의 이름이 오래도록 적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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