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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Feb 19. 2024

한밤의 정원사

마음을 다듬는 사람


 한 작은 마을에 아름답고 웅장한 부엉이 나무 조각이 등장한다. 외롭고 적막해 보이는 이곳엔 삶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건조한 사막 같은 무채색의 마을. 보육원에서 외롭게 사는 소년 윌리엄도 어느 날 아침 사람들과 함께 커다란 부엉이 나무를 발견한다. 그날 이후 마을에는 매일 다양한 동물모양 조각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일어나자마자 설레는 마음을 안고 밖으로 향했다. 오늘은 또 어떤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까. 낡은 마을 곳곳에 고양이, 토끼, 코끼리, 용 모양 나무 조각이 자리 잡았다. 자신의 집 앞에 멋진 조각이 생긴 사람은 지붕을 수리하고 새로 페인트를 칠했다. 손잡고 나무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용 조각이 등장하던 날에는 마을 전체가 늦게까지 축제를 열었다. 그렇게 조금씩 마을이 변해가고 있었다.


 우연히 정원사의 정체를 알게 된 윌리엄. 공원에 새로운 조각을 만들러 가던 할아버지는 자신을 도와달라 정중히 부탁한다. 두 사람은 밤늦도록 나무를 다듬었다. 기린, 타조, 고래, 코뿔소, 곰 모양 조각이 생긴 공원은 마치 커다란 놀이공원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공원을 찾아와 연을 날리고 나무를 구경하고 자전거를 탔다. 눈 비비며 일어난 윌리엄 옆에 나무 다듬는 가위가 놓여 있다. '윌리엄에게'라는 작은 쪽지를 매단 채. 한밤의 정원사는 윌리엄과 마을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가을이 오자 단풍이 들고 하나둘 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만든 아름다운 나무 조각들은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만다. 눈 내린 겨울에는 앙상한 가지만 겨우 남아 있었다. 모든 게 물거품처럼 사라진 듯했지만 아니었다. 봄이 되고 다시 여름이 왔다. 무채색의 마을은 완전히 달라졌다. 말끔해진 집집마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앞마당에는 색색의 꽃과 초록의 나무가 가득했다. 손잡고 산책하는 가족과 뛰노는 아이들과 어슬렁거리는 동물들이 있다. 사람들 스스로 마을에 다양한 색을 불어넣고 있었다. 핑크빛으로 물든 하늘과 왁자지껄한 마을의 풍경이 어우러져 마치 하나의 그림 같다. 사람들의 삶 그 자체가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다. 한밤의 정원사가 나무를 다듬으며 바랐을 모습이 이루어진 것이다.


 늦은 밤 공원 한편에서 윌리엄이 나무를 다듬는 장면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소년은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찾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할 수 있으니까.

 한밤의 정원사는 어디로 갔을까? 책은 끝났지만 할아버지의 다음 행선지가 궁금했다. 생기를 잃은 채 살아가는 건 비단 그림책 속 사람들 뿐만은 아닌 거 같아서다. 내 주변 사람들, 내가 사는 동네와 도시,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정원사의 나무 조각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서로 미워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가득한 이 어지럽고 슬픈 시대야말로 아름다운 나무조각이 필요하다. 그러면 아주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처음엔 정원사가 모든 것을 바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번 읽고 나서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작은 계기를 만들어줬을 뿐 사람들은 스스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굳어버린 마음을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고 모난 곳은 둥글게 만들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의미 있는 변화는 대단한 이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작은 힘을 모아 만든다. 친절, 따뜻한 말, 조용히 들어주는 마음, 진심을 담은 위로. 우리는 서로에게 작은 계기가 되어줄 수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과 기쁨이 될 수 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니 삶에 대한 혼란과 인간에 대한 절망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나 고민하게 된다. 평범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흔들리지 않고 글을 쓰는 것. 나의 작은 글이 외롭고 지친 누군가에게 반드시 닿을 거라 믿으며. 계속 글을 쓰고 사랑을 말해야지. 그렇게 나만의 나무 조각을 정성스럽게 다듬어 하나둘 세상 밖으로 꺼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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