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수진 Mar 04. 2024

가만히 들어주었어

각자의 방식으로 위로하는 방법



  우리는 듣는 것보다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많은 이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다. 글 쓰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세상 밖으로 자신을 꺼내 연결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계획과 목표, 이루고 싶은 꿈들에 대해 신나서 얘기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상대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만다.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어땠더라. 반대로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내 표정은 어땠었나. 경청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스스로가 괜히 부끄러워진다.

     

  우리 가족 중 경청을 잘하는 사람은 단연 남편이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남편은 하루치 쌓여 있는 나와 딸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들어준다. 물론 항상 듣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이 뚜렷한 탓에 들어주다가도 갑자기 말을 낚아채 의견을 말하곤 한다. 왜 자꾸 말을 끊냐고 말하다 말고 나도 아이도 토라지고 남편은 난감해지는 것이 우리 가족의 패턴이다. 경청을 잘하는 사람도 가만히 들어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코리 도어펠트 작가의 <가만히 들어주었어>는 제목 그대로 경청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테일러는 자신만의 멋진 것을 완성하고 기뻐하고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좌절에 빠지고 만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원하던 일을 드디어 해냈는데 생각지 못한 이유로 와르르 무너져버린 순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고, 그 어떤 위로나 격려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 순간 말이다. 혼자 있고 싶은 테일러에게 자꾸만 다른 동물들이 다가온다.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라고 하거나 그냥 잊어버리라고 한다. 숨어 버리라고 하거나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보라고 강요하거나 복수를 권하기도 한다. 모두 도와주고자 한 행동이었지만 정작 중요한 테일러의 마음이 빠져 있었다.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는 위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토끼가 조용히 다가온다. 아무 말 없이 테일러 옆에 자리 잡은 토끼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어설픈 격려도 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스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테일러는 토끼에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속상한 마음에 울어도 보고, 크게 소리치기도 하고, 숨어보기도 했다. 테일러가 슬픔을 털어내는 동안 토끼는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테일러가 말한다. 나 다시 해볼까? 이 그림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저 가만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절망에 빠진 이에게는 가장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모는 뒤에서 조용히 지켜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발 앞서 아이를 걱정하게 된다. 긴 겨울 방학이 드디어 끝나고 아이는 오늘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간다. 새벽부터 눈이 떠지고 마음이 쿵쾅거렸다. 어른인 나도 이 정도인데 아이는 오죽할까. 담담해 보이지만 아이 역시 잠을 설친 얼굴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학교, 낯선 선생님과 친구들과는 어떻게 적응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목소리에는 설렘과 긴장이 가득했다. 이사를 결정한 게 잘한 걸까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히 힘들게 만든 건 아닌지 앞선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좋아하는 메뉴로 아침을 준비하고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들어주는 것.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응원이었다.

    

  가방을 메고 나란히 학교로 향했다. 등교하는 아이들의 물결에 섞여 한 발 한 발 앞으로. 기분 좋은 긴장감은 아이를 한 뼘 더 자라게 할 것이라 믿는다. 나는 테일러 옆에 앉아 조용히 체온을 전하던 토끼처럼 가만히 들어주면 된다. 도중에 말을 낚아채거나 섣부른 걱정을 더하지 않고. 아이가 등교 준비를 하는 동안 지난밤 써둔 편지를 필통에 몰래 넣어 두었다. 오늘 최고로 행복한 하루이길 바란다고. 친구들, 선생님과 즐겁게 보내고 이따 반갑게 만나자고. 당분간 귀여운 편지지에 마음을 담아 필통에 넣어 둘 생각이다. 하루하루 적응해 나갈 아이에게 작은 선물이 되길 바라며. 하교 후 나를 향해 달려올 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벌써 아이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