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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Mar 11. 2024

민들레는 민들레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한 편의 동시 같은 글과 깔끔한 그림이 인상적인 <민들레는 민들레>를 오랜만에 읽었다. 봄이 다가올 때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림책이다. 작은 싹이 흙을 뚫고 나오고, 꽃이 피었다 지고, 털 달린 씨가 맺혀 하늘하늘 날아가는 민들레의 한살이가 우리 인생과 닮았다.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는 '민들레는 민들레'라는 문장을 되뇌다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민들레는 민들레, 나는 나, 너는 너.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고마운 책이다.


  어린 딸과 긴 하루를 보내던 시절, 도서관 구석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입에 착 달라붙는 리듬감 있는 문장 때문인지 아이는 이 그림책을 좋아했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민들레는 민들레, 나는 나, 엄마는 엄마, 아빠는 아빠, 나무는 나무, 꽃은 꽃, 고양이는 고양이-"하며 노래를 만들어 부르곤 했다. 어느 늦은 밤에는 잠이 들락 말락 하다 갑자기 이 책을 떠올린 때도 있었다. 높은 기와집 지붕이나 단단한 콘크리트 벽, 도시의 메마른 타일 사이에서도 민들레는 씩씩하게 피어난다고. 그림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민들레를 떠올리며 잘 자랐으면 좋겠다던 예쁜 마음이 스민 밤이었다.


  나는 이 책이 '나는 나'라고 씩씩하게 말해서 좋았다. 어떤 모습으로 있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자기 자신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분명한 이 사실을 점점 잊고 사는 게 아닐까 싶은 요즘이다.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수시로 낚아채는 수많은 어지러운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필요가 있다. 잠시라도 내가 나일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정해둔 길로 가야 할 것만 같아 아등바등 살지도 모른다. 삶에는 수많은 모습과 방향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하굣길에 반갑게 만난 딸과 함께 천천히 걷는다. 새로 다닐 학원과 문제집을 알아봐야지 하면서도 일단 뒤로 미룬다. 대신 봄이 움트는 생명력 넘치는 동네 곳곳을 들여다본다. 나무와 꽃, 돌과 이끼, 건물과 자동차, 걷거나 뛰는 사람들. 모두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생생하게 느낀다. 집 짓는 까치나 산책하는 강아지, 께느른하게 누워있는 고양이, 사랑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덤불과 돋아나는 새싹들. 이런 작은 것들에서 삶을 배운다. 걷다 보면 언젠가 진짜 민들레를 만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땐 이 책을 떠올리며 있는 그대로 씩씩하게 피어나라 응원을 건넬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는 새로운 학교와 동네에 적응하며 매일 한 뼘씩 자라고 있다. 이른 아침,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의 물결에 휩쓸려 걷는 딸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아이들 틈에 섞여 걷다 보면 때론 서둘러야 할 것 같고, 빨리 걷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조급함이 생긴다고 했다. 어차피 목적지는 똑같으니 너만의 속도로 걸으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매일 웃는 일만 있진 않겠지. 속상하고 억울한 일도 많을 것이다. 몇 번을 밟혀도, 피어나기 어려운 곳에서도 결국 싹을 틔우는 민들레처럼 딸의 얼굴에도 노란 웃음이 몇 번이고 피고 지기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기를. 나를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가는 아이를 조용히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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