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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Dec 28. 2023

디저트 만드는 마음

늦가을의 디저트


  J와 함께 작은 디저트 가게를 방문했다. 정성스럽게 디저트를 만든다고 소문난 곳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골목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에는 작은 입간판만 수줍게 놓여 있었다. 눈길을 끄는 인테리어도 소품도 없었지만 조용히 흐르는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액자 하나가 무심히 걸려 있고, 나무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놓여 있는 곳. 작은 사이즈의 쇼케이스와 냉장고가 전부인 곳. 구움 과자는 벌써 품절이고 케이크만 아슬하게 몇 종류 남아있었다. 우리는 레몬 진저와 다크초콜릿 케이크,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디저트만 전문으로 파는 카페는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비싼 가격을 보고 놀랐지만 입소문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자리를 잡았다.

    

  “디저트에 대해 직접 설명해드리고 있는데, 혹시 필요하신가요?”

     

  동그란 쟁반에 담긴 커피와 케이크를 살포시 내려놓으며 사장님이 말을 걸었다. 세상에. 직접 만든 디저트에 대한 설명이라니. 순식간에 유명 셰프의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었다. 우리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레몬진저케이크는 고소한 피칸 크럼블로 촉촉하게 시트를 만들었어요. 그 위에 레몬가나슈와 레몬 커드로 모양을 채웠어요. 생강을 살짝 우려내서 생크림과 섞어 보았는데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난답니다. 초콜릿케이크는 달콤 쌉싸름한 다크초코로 시트를 만들고, 다크 가나슈를 한 겹 더 입혀 완성해 보았어요. 상반되는 맛이니까 레몬 진저케이크를 먼저 드시고 그다음 초콜릿케이크를 맛보시면 됩니다. 맛있게 드세요.”

     

 귀한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나긋한 목소리로 어찌나 설명을 잘하는지 듣는 내내 케이크 만드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J와 나는 포크로 케이크를 조심스레 잘랐다. 입안에 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볼 수밖에 없었다. 섬세함이 넘치는 행복의 맛. 우리는 입안 가득 행복을 우물거리며 웃고 또 웃었다.

     

  사장님은 매일 어떤 마음으로 디저트를 만들까. 계절에 맞는 재료를 고르고 어울리는 조합을 찾으며 구움 과자와 케이크를 준비할 것이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무조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온 힘을 다해서. 디저트가 완성되면 입간판을 세우고 문을 활짝 열어 오늘의 손님을 기다린다. 디저트에 대한 설명을 여러 번 체크하고, 다가오는 다음 계절의 메뉴를 고민하겠지.

  매일 같은 장소에서 꾸준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우리 집 식탁에서, 카페에서, 도서관에서 매일 고군분투 중이니까. 이 작고 소박한 가게가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고 오래도록 이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 이곳에 들러 디저트를 먹으며 잠시 숨을 고르고, 글을 써도 좋을 것이다. 자신의 일을 아끼는 사람의 공간에는 엄청난 힘이 있으니까. 

      

  케이크는 어느새 게눈 감추듯 사라져 버렸다. 맛있는 걸 천천히 먹는 건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라며 큭큭 웃었다. 나란히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밖을 바라보았다. 빨간 단풍이 데굴데굴 가게 안으로 바람을 타고 들어오고, 그 위로 햇빛이 내려앉는다. 전등이 살짝 흔들리고,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자전거와 멀리서 들려오는 학교 운동장의 소음이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이 된다. 나른하고 평화롭다. 정성스러운 디저트를 먹는 여유가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늦가을의 풍경. 고소한 버터향과 또 다른 디저트가 구워지는 맛있는 냄새가 가게를 꽉 채운다. 달그락달그락 사장님의 바지런한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이어진다. 또 다른 테이블의 손님은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 케이크를 잘라 천천히 먹으며 창밖을 본다. 각자의 가을이 지나고 있다. 짧아서 더욱 아름다운 계절. 올해 늦가을은 달콤한 레몬진저와 쌉싸름한 다크초코의 맛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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