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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Jan 02. 2024

어떤 책의 역사


  어떤 책과의 인연은 생각보다 질기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그랬다. 도서관 반납함에서, 서점 책장을 둘러보다가, 최근 읽은 책 속 작가의 추천으로. 자주 마주치길래 이쯤 되면 읽어봐야겠다 싶었다. 집 근처 도서관에는 예약이 꽉 차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초판본을 포함해 두 권 있었다. 그 근처에 맛있는 라테를 파는 카페가 있으니 겸사겸사 다녀오기로 했다. 그렇게 아침부터 낯선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찌 된 일인지 십 분째 책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사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무래도 잘못 꽂혀 있는 것 같다며 반대편 서가를 찾기 시작하는 사서를 따라 나도 왼쪽부터 천천히 훑어보았다. 책은 오른쪽 맨 밑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누가 이렇게 아무 데나 꽂아둔 걸까. 얼른 한 권을 대출하고 나머지 한 권의 자리를 찾아주기로 했다. 그러나 양 쪽으로 꽉 낀 책 사이에 도저히 넣을 수가 없었다.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책들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레 몇 권을 꺼내 다음 번호로 이어지는 서가로 옮겼다. 테트리스를 하듯 빈 공간에 책을 끼워 넣었다. 진짜 자리를 찾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책에게도 자신의 자리가 있다. 우리에게 각자의 자리가 있는 것처럼. 

    

  소독기에 책을 넣으려는데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당신의 발 건강을 책임집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날짜를 보니 철 지난 광고지다. 한여름의 광고지를 초겨울에 발견한 셈이다. 뒷면에는 이 책을 읽었을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책 제목과 작가 이름이 적혀 있다. 군데군데 종이 인덱스가 붙여진 문장들도 있었다. 흔적을 그대로 남긴 채 반납할 정도로 바빴나. 소독기가 돌아가는 동안 이 책을 대출했을 사람들에 대한 상상이 이어졌다. 모두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선택했을까.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은 표지가 낡았고, 종이가 흐물거리고, 누렇게 변색되어 있다. 얼룩이 묻어 있거나 밑줄이 그어져 있을 때도 있다. 어떤 책의 역사는 이렇게 쌓여간다. 손대 가득한 책을 읽을 때면 그들의 삶까지 나에게 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문장 사이사이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삶이 스며있을 것만 같다. 한 줄 한 줄 마음을 담아 읽는다. 기분 좋은 무게감을 즐기면서.


매일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서가에 꽂히지만 사실 도서관의 책은 보관 센터의 유실물처럼 주인을 찾을 때까지 임시로 맡겨진 것에 불과하다. 책은 모두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 있는 것이며, 한정된 공간 안에서 폐기 도서로 분류되는 기준도 결국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용했느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관심과 기억에서 멀어진 책은 여기를 떠나 다시 어딘가로 옮겨진다.

-강미선, <도서관의 말들> 


  인연이 닿지 않거나 선택받지 못한 책은 오랜 잠을 잔다. 나 역시 책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면,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면, 애초에 책 읽는 삶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 책과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괜히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진다. 중요한 삶의 의미 하나를 잊지 않고 살고 있으니까. 조용히 잠들어 있는 이름 모를 책들에게 마음이 쓰인다. 나라도 그 잠을 하나둘 깨워보면 어떨까. 베스트셀러도 좋고, 유명작가의 책도 좋지만 어딘가 숨어 있는 보물 같은 책을 찾아내는 일. 이것이야 말로 읽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서가 사이를 산책하듯 걷다가 마음에 드는 제목의 책을 꺼내 촤르르 펼쳐보고, 책상에 앉아 읽는 일. 어떤 책의 역사 위에 나의 삶을 겹치는 것. 앞으로 내가 써나갈 글의 시작을 만들어 내는 것.

          

  그렇게 만들어낸 글더미가 언젠가 책이 된다면, 나의 책은 또 어떤 역사를 쓸까. 언젠가 서가 안을 빙글빙글 걷다가 우연히 내 책을 발견하는 이에게, 내 책이 작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이 뻐근해질 정도로 긴 여운을 남길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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