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토)
어릴 적 부친의 결정은 늘 대쪽 같았다. 모친도 형도 누나도 감히 그 의사를 꺾지 못했다. 그나마 부친의 말을 고분고분 잘 따랐던 막내인 나만이 가끔 바른말을 올릴 수 있었다. 어른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던 유년 시절은, 어쩌면 내면에 쌓인 울분만큼의 발언권을 비축해 온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족들은 난처한 상황이 생길 때면 종종 나를 앞세우며 “너라도 한번 말해봐”라고 부탁하곤 했다. 오늘 내가 부친에게 씻자고 권했을 때, 순순히 응해주신 것도 그런 오래된 관계의 문법 때문이었을까.
“가렵다면서 여기저기 벅벅 긁으시네.”
“허리가 아파서 그러시는지, 씻자고 해도 자꾸 싫다고만 하셔.”
모친의 걱정 섞인 말에 내가 나섰다. “제가 점심 먹고 샤워하시자고 말씀드려 볼게요.”
부친은 내가 아는 남자 중 깔끔하기로 으뜸인 분이었다. 사회에서 내가 “은근히 깔끔하시네요”라는 말을 듣게 된 것도 실은 부친을 보고 자란 덕이다. 밖에서 만난 이들 중에는 하루 한 번 샤워하는 걸 유난스럽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지만, 부친은 하루에 두 번씩 샤워를 하기도 했다. 머리는 항상 정갈했고, 깎지 않아 덥수룩한 수염을 본 날이 손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부친에게선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허리가 아픈 탓인지, 걸음이 불편해서인지, 아니면 칫솔만 보면 이미 닦은 이를 또 닦는 그 희미해진 기억 때문인지 모르겠다. 짧은 머리는 늘 누워 지내느라 눌려 있고, 깎지 못한 수염은 희고 덥수룩하게 자라났다. 노화된 피부에 겨울철 건조함까지 더해져 하얀 각질이 잔뜩 일어나기도 했다.
샤워를 위해 화장실에서 부친의 윗옷을 벗겨 드렸는데, 하얀 각질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부친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죽은 세포들 같기도 했고, 어쩌면 갈 곳 잃고 흩어져 버린 부친의 기억 조각들 같기도 해서 마음이 아렸다.
모처럼 샤워를 마치고 말끔해진 모습으로 나오시자, 모친은 부친에게는 예뻐졌다는 칭찬을, 나에게는 고생했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막내아들의 청에는 기꺼이 응답해 주시는 부친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렇게라도 생기를 되찾으신다면 내가 더 자주 씻겨 드릴 수밖에 없다. 매일 곁을 지키는 모친의 노고에 비하면, 이 정도는 수고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이다.
3월 2일(월)
우연히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K 모 회사에서 하는 공모전이 눈에 들어왔다
‘2046년 나의 이야기’ - 20년 뒤에 오늘,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내가 사는 세상은 어떨까? 일어났으면 하는 일들을 자유롭게 상상해 주세요
[인공지능은 의료 분야에서도 세상을 바꿨다. 스캔 한 번이면 몸 안의 모든 질병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질병은 정복되었고 노화는 선택의 영역이 되어, 인간의 수명은 어느덧 150살을 넘겼다.
가장 큰 기적은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다. 치명적인 질병으로 위기를 겪으셨던 부모님이 건강을 되찾으셨고, 우리는 다 함께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행을 다녀왔다. 기술이 선물한 것은 영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3월 4일
날이 제법 풀렸다. 기온이 적당해 급히 차를 주차하고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피부에 닿는 공기는 아직 조금 쌀쌀하지만, 봄을 알리기엔 충분한 기운이다. 중동의 전쟁 소식으로 분주하고 혼란한 뉴스와 달리 공원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달리기 좋은 기온을 즐기는 사람들과 한가로이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들만이 눈에 띄었다.
언제나 내 마음은 갈팡질팡이다. 산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발 속에서 불편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걸음을 옮기던 중 작은 돌멩이 하나가 불쑥 들어간 모양이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닿는 감각이 거슬렸다. 귀로 듣는 전쟁 소식보다 발끝의 이질감이 더 신경 쓰였던 걸 보면, 지금의 내게는 당장 발밑의 평화가 뉴스 속 세계 평화만큼이나 간절했던 것 같다.
그 좁은 공간에서도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돌멩이는 몇 걸음 동안 나를 괴롭히다가, 막상 빼려고 마음먹으면 어디론가 얄밉게 숨어버렸다. ‘그냥 걷자’고 체념하면 이내 다시 나타나 신경을 건드렸다. 뺄까 말까를 한참 고민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공원의 반환점까지 와버렸다.
삶은 신발 속 돌멩이처럼 언제나 감내할 만큼만 거슬리곤 한다.
나의 성향은 늘 그랬다. 대개 전체의 흐름을 깨지 않는 방향으로, 나 하나 불편을 감내하는 결정을 내리곤 했다. 직장 생활에서도,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불편도 쌓이면 탈이 나기 마련이고, 그 인내의 대가는 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전가되기도 했다. 만약 어떤 이물감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힌다면, 그리고 해결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흐름이 조금 깨지더라도 잠시 멈춰 설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나를 지키고, 나를 둘러싼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남은 절반의 산책을 위해 결국 신발을 벗기로 했다. 멈춰 서서 털어내니 눈곱보다 조금 더 큰 돌멩이 하나가 툭 떨어졌다. 발바닥도, 뉴스도 온통 불편한 것 투성이었지만, 그 작은 것 하나를 털어낸 덕분에 남은 산책길은 이전보다 훨씬 가뿐하고 평온해졌다.
3월 5일
창작의 고통보다 퇴고의 굴레가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걸 보면, 여전히 나는 초보의 허물을 벗지 못한 모양이다. 고치고 고쳐도 다시 읽으면 고칠 것투성이다. 투고까지 마친 원고도 이렇게 수정하고 있으니 오만가지 생각에 혼란하다. 이 글이 정말 책이 될 수 있을까. 나의 노력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분명 어린 시절에 성실하게 노력하면 끝내 성공한다고 배웠다. 부족한 조건은 노력이란 거름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다. 노력보다 앞서는 '조건'의 벽은 높았고, 성실함이 이용당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회의감이 밀려왔다. 노력하라는 가르침은 어쩌면 기득권이 만들어낸 달콤한 속임수가 아닐까 의심하며, 세상의 이치에 냉소적이 되기도 했다.
요즘 안양천을 걷다 보면 러닝 열풍을 실감한다. 비인기 종목이던 달리기가 어느새 대중적인 취미가 되었고, 시작은 달랐지만 나 역시 그 흐름의 한 귀퉁이에 올라서 있다. 그런데 가끔 TV에서 몇 년 되지 않은 초보가 마라톤 풀코스를 거뜬히 완주하고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걸 볼 때면, 묘한 무력감이 든다. 몇 년째 10km도 벅차게 소화하는 내 심장과 피지컬은 재능의 영역 밖인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 고작 2km 지점에서도 마음은 핑계를 만들어낸다. ‘몸도 안 따라 주는데 그만 무리해.’ 달릴 때마다 ‘오늘은 여기까지’라는 단어가 꼭 따라온다. 유독 숨이 가쁘고, 괜히 배가 아픈 것 같은 느낌은 어쩌면 몸이 만들어낸 적극적인 핑계일지 모른다. 그만둘까 계속할까를 수만 번 고민하며 발을 내딛다 보면, 어느 순간 ‘기왕 나온 거 끝까지 가보자’는 평온함이 찾아온다. 그렇게 완주한 7km. 누군가에겐 짧은 거리일지 몰라도, 그 안에는 나만의 치열한 노력과 소중한 성과가 깃들어 있다.
생각해보면 노력이란 건 타인보다 ‘더 잘하기 위한’ 도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안양천을 달리는 이유는 마라토너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건강을 위함이고, 달리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기 위함이다.
부족한 필력과 보이지 않는 성과 앞에서 내 마음은 오늘도 수시로 흔들린다. 하지만 달리기와 글쓰기는 참 많이 닮아 있다. 노력이란 건 '더 나은 결과를 내라'는 세상의 채찍질이 아니라, '멈추고 싶은 나'를 한 번 더 다독여 발을 내딛게 하는 작고 내밀한 응원인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하는 퇴고의 반복도, 지워버리고 싶은 문장을 붙잡고 씨름하는 이 시간도, 실은 대단한 명작을 남기기 위해서라기보다 '쓰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지 싶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속도면 어떠랴.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도 결국 7km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그 개운함처럼, 오늘도 이 지루한 문장들을 견디며 나만의 거리를 채워갈 뿐이다.
3월 6일(금)
예상치 못한 사고들로 병원을 드나들긴 했지만, 오늘은 3개월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부친의 정기 진료일이었다. 몇 가지 검사와 네 가지 진료 과목을 모두 소화하기 위해 아침부터 서둘렀다. 본가에 도착하니 부친은 아직 잠이 덜 깬 듯 몽롱해 보이셨고, 힘겨운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느릿느릿 세면대에 물을 받으셨다. 내가 왜 왔는지 알고는 계시는지 모르겠다. 재촉한다고 될 일도 아니기에, 마치 아이를 지켜보는 심정으로 화장실 문 앞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소매가 다 젖은 채로, 그러나 머리는 깔끔하게 빗고 나오셨다. 그래도 외출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계신 듯했다.
오늘은 유독 부친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병원 안에서는 휠체어를 대여하면 그만이지만, 갑자기 다시 추워진 날씨에 주차장에서 병원 출입구까지 모시는 일이 문제였다. 다행히 주차 대기 행렬이 없었고, 입구 바로 앞에 차를 세우고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속전속결로 휠체어를 빌려 첫 번째 과제인 채혈실로 향했다. “소매가 젖어 있으신데….” 검사원은 소매에 이물질이 묻어 있으면 결과가 잘못될 수 있다는 우려에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나 소변이 묻은 건 아닐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아침에 세수하시다가 젖은 겁니다.” “아, 물이면 괜찮습니다.” 주삿바늘이 들어갈 때 미간을 찡그리시긴 했지만, 다행히 첫 검사는 무난하게 마쳤다.
아침 식사를 해결하는 일이 걱정이었다. 불과 3개월 전 검진 때만 해도 휠체어 없이 인근 식당까지 걸어서 다녀오곤 했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대여한 휠체어는 밖으로 가져갈 수 없고, 바람은 차고, 부친의 걸음은 너무 느리니 마땅히 나갈 곳이 없었다. 결국 인적 드문 지하 매점 앞 의자에 앉아 파리바게트 빵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근사한 식사를 대접해도 모자랄 판에 빵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부친은 치아도 불편하신데, 그놈의 샌드위치는 빵이 왜 그리도 질겼는지 모르겠다.
“엑스레이상으로 지난번 검사와 비교했을 때 큰 변동은 없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붙어가던 척추뼈가 다시 틀어졌거나 다른 문제가 생겼을까 봐 노심초사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신경외과에서도 큰 소견이 없어 오늘은 이대로 잘 지나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우려는 늘 기대를 비껴가지 않는다. 내과 의사는 신장에 무리가 오고 있고, 당뇨 수치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투석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인슐린을 조금 더 맞으세요.” 신경외과에서 줄인 약보다 내과에서 늘어난 약이 훨씬 더 많아졌다.
눈에 띄는 성과 없이 진료 과목은 늘고, 약 봉투만 점점 두꺼워진다. 이 모든 증상이 정말 치료되고 있기는 한 걸까. 아픈 곳을 고치는 곳이 병원이라지만, 부친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의료기술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결국 나이 들고 병이 찾아오면 '돈 없이 아프다 죽느냐'와 '돈을 쓰며 조금 더 오래 아프다 죽느냐'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닐까. 회의감이 든다. 그렇다고 치료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정말 투석을 권유받거나 더 강한 약을 써야 할 때가 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다.
더 많아진 약의 복용법을 설명해 드리는 동안, 곁에 계신 모친은 여러 차례 깊은 한숨을 내뱉으셨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과 다가올 날들에 대한 공포가 뒤섞인 숨결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막막함이 내게도 전해져 와, 나 역시 그 무거운 한숨을 나누어 마셨다.
해드릴 게 없다는 자책보다 나를 더 괴롭히는 건, 시간이 지날수록 이 비극에 몹쓸 만큼 무뎌져 가는 나의 모습이다. 부친의 병세보다 모친의 고단함이 먼저 눈에 밟히고, 약봉지가 두꺼워질수록 늘어날 병원 비용을 먼저 계산하게 되는 나를 마주할 때면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빌어먹을 나의 효심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현실의 무게가 더 크게 다가오는 오늘, 아픈 아버지보다 못난 나를 견디는 것이 더 고역이었다.
3월 7일
“엄마 오늘 금목걸이 팔았는데, 얼마 받은 줄 알아?”
모친을 모시고 안과에 다녀오면서 누님이 묻는다. 얼마 전부터 눈곱이 많이 낀다는 모친을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오는 길에 식사도 하고 금은방에도 들른 모양이다.
“형편이 목걸이까지 팔아야 할 정도예요?”
짐짓 놀라 묻는 내게 모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치신다.
“아니야. 그냥 있어 봐야 차지도 않는데, 요즘 금값도 많이 올랐다고 해서 팔았어.”
그러더니 어머니는 나에게 어제오늘 수고했다며 10만 원을 건네주셨다. 차지 않는 목걸이라는 말이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뻔한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태려고 판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수입은 끊겼는데 부친과 당신의 병원비는 만만치 않고, 그 비용을 직접 다 감당하고 계시니 형편이 넉넉할 리가 없다. 안 받겠다는 실랑이 끝에 결국 등 떠밀리듯 돈을 받았다.
병원비 한 번 흔쾌히 내드리지 못하면서, 어머니가 목걸이를 팔아 만든 돈까지 받아야 하나 생각하니 미안하고 죄송했다. 그런데 더 지독한 건, 그 돈을 손에 쥐는 찰나 이번 달 카드값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이 불효자식아, 너는 대체 어디까지 추락할 작정인가.’ 자책이 밀려왔지만 손바닥 위의 10만 원은 무겁고도 차가웠다. 어머니의 목에 걸려 있어야 했을 금목걸이가 내 생활비로 치환되다니, 오묘하고 비루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