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 주의자의 결혼생활
남의 아들은 필요없다 편
동갑이지만 듬직하고 어른스러워 오빠 같았던 병히는 결혼 후 여섯 짤 손 많이 가는 남의 집 아들이 되었다. 몰디브 신혼여행을 가선 주머니에 스마트 폰을 넣은 채 바다에 뛰어들어 지속을 난감하게 만들더니, 트렁크 비번을 바꿔달란 부탁에 두시럭 대다 덜컥 트렁크를 잠기게 했다. 그는 지속에게 000부터 999까지 잠금장치를 일일이 돌려보는 수고로움 안겼고 생뚱맞은 숫자 900에서 트렁크는 열렸다. 저걸 죽여 살려. 한국에 와선 택시에서 짐을 내리는데 내리막 길에 트렁크를 그냥 두는 것이 아닌가! 어? 어! 붙잡을새 없이 바퀴가 굴러갔고 트렁크는 내동댕이쳐졌다.
4년 동안 매 주말마다 단 하루를 만나 데이트를 했기에 지속은 병히가 이리도 나사가 빠진 놈인 줄 몰랐다. 결혼 후 일주일 만에 지속은 병히에게 실망했다. 기대고 싶던 듬직한 병히는 없고 물가에 내놓은 웬 사내아이 하나가 곁에 있었다.
병히는 지속을 엄마를 대신하여 자신을 돌봐줄 여자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신혼의 달달함도 없이 퇴근 후 병히는 지속이 차려준 저녁을 먹고 지속이 세탁해둔 옷으로 갈아입은 후 컴퓨터 앞에 앉아 새벽까지 게임만 했다.
지속은 불행했다. 고향을 떠나 병히의 터전으로 옮긴 터라 그녀 주변에는 친구도 가족도 아무도 없었다. 오직 병히뿐이었는데 병히는 지속을 외롭게 만들었다. 한 번씩 잠이 든 병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랑을 속삭이던 그가 잠든 그가 맞나 확인하고 싶었다. 하드웨어는 분명 그대로인데 바이러스에 걸렸나 소프트웨어는 맛탱이가 갔다. 결혼을 꿈꾸었던 지속은 그렇게 비혼 주의자가 되어버렸다.
혼인신고만 안 했어도 당장 짐을 싸 친정으로 갔을 텐데 병히는 유독 혼인신고를 서둘렀다. 그래서 결혼식 전날 이끌려 신고를 하면서도 찜찜했다. 아파트 때문에 해야 한다고만 말해 내막도 모른 채 지속은 그렇게 진짜 유부녀가 됐다.
결혼 후 자기 살림을 산다는 것이 이토록 고달픈지 지속은 몰랐다. 병히는 지속이 전업주부라는 이유로 쓰레기봉투 한 번 묶어 버리지 않았고 화장실 청소 한 번을 안 했으며 분리수거도 나 몰라라 했다. 아무리 놀아도 둘이 먹고 치우는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분했다. 치킨을 시키면 지속은 앞접시를 세팅하고 포장을 풀어 나무젓가락 껍질까지 벗겨놓고 병히를 불렀다. 와구와구 치킨을 뚝딱 먹은 병히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가고 지속은 닭뼈와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다.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병히였다. 그는 오직 폰 게임을 할 때만 신나게 손가락으로 액정을 두드렸다.
강사 시절엔 그래도 주말은 있었는데 월급도 없이 무급으로 뭐하는 짓인지 지속은 현타가 왔다. 물론 병히에게 생활비는 받았다. 그건 둘의 생존을 위한 비용일 뿐 지속의 노동력에 상응하는 대가는 아니었다. 모든 여자가 다 그렇게 산다고 하지만 지금이 못 먹고 못살아 입 하나 줄이려 딸을 시집보내는 세상도 아니고 지속은 병히의 와이프가 아닌 종년이 된 기분이었다.
이대로 병히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순 없었다. 평생 남의 아들 뒤치다꺼리만 하다 인생이 쫑날 듯 싶었다. 다들 알지 않은가. 평온해 보여도 화가 많은 지속인 걸. 지속은 병히에게 불만을 와다다 쏟았다.
"그래도 낮에 넌 편히 쉬잖아. 알겠어..... 도울게"
깨작깨작 이부자리 정돈을 한 두 번 하더니 그때뿐, 병히는 다시 손하나 까딱하지 않는 근엄한 가장이 되었다. 연애 때 정말 잘하겠다던 그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지속의 이야기를 반짝이는 눈으로 들어주던 병히는 떠나고 동태 눈깔을 한 채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하는 모지리만 눈앞에 있었다. 지속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못 마시는 맥주 한 캔을 비우고 병히에게 말했다.
"우리 애 없을 때 이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