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여신님
위기의 지속을 구해준 건? 편
처음 수영 강습을 듣는 지속은 혹여나 물이 눈에 들어갈까 봐 수경을 꽉 조이며 쭈뼛쭈뼛 물속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녀가 섞여있는 초급반은 서로가 서로를 어색해하는 분위기였다. 바로 옆 레일은 오래된 반인지 레슨도 없이 사람들이 줄지어 바로 잠영 후 빠르게 레일을 돌았다. 첫날은 발차기만 주야장천 연습시켜서 종아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옆 레일의 돌고래 떼를 보며 지속은 언제쯤 저런 날렵한 몸짓으로 물살을 가를수 있을까. 부러운 시선으로 하염없이 보다 수영장 물을 좀 먹었다. 비록 발차기만 하다 끝난 운동이었지만 뭔가를 한 것 같아 개운하게 샤워실로 들어섰다. 한데 샤워기마다 오색의 샤워타월이 걸려있고 개인 목욕바구니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지속은 난감했다. 여기가 목욕탕도 아니고 굳이 자리를 맡을 이유가 있을까? 그래서 비교적 단출하게 물건이 한두 점 놓인 샤워기에서 씻고 있는데 할줌마 무리가 뭐가 재밌는지 깔깔대며 들어섰다. 그리곤 한 명의 돌고래 할줌마가 씻고 있는 지속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이런 말을 했다.
"아가씨, 여긴 내 자리야. 저리 비켜. 근데 팬더야 뭐야?"
뭐래. 지속은 샴푸 거품도 제대로 헹구지 못하고 벌거벗은 상태로 돌고래 할줌마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답도 안 하고 자리를 피해 저쪽 끝 구석 아까는 발견 못한 아무 짐도 없는 샤워기로 도망치듯 갔다. 헤드가 고장 나 물살이 자꾸 옆으로 삐져서 샤워기를 옆으로 괴상하게 들고 씻어야 하는 불편한 자리였다. 찜을 안 당한 이유가 다 있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곤 할줌마가 찾은 팬더의 뜻을 알았다. 수경을 너무 꽉 조였나. 수경은 아까 벗었는데 계속 수경을 쓰고 있는 듯 눈가에 선명한 안경 자국... 지속은 할 말을 잃었다.
지속은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털고 나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머리가 좀 길었다. 또 다른 돌고래 할줌마가 그런 지속을 마땅찮게 보더니 결국 지속을 살짝 밀쳤다.
"젊은 사람은 젖은 머리로 나가도 돼. 노인네들이 머릴 말려야지 양보 좀 해!"
이게 뭔 개소리야. 콤보로 당한 공격에 지속은 너무도 황당했다. 따지려 하는데 돌고래 떼들이 다가왔다. 쪽수로 밀리는 상황이고 나이에서도 밀려 자칫 경솔하게 행동했다간 6개월을 못 채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 참았다. 회원권 중도해지 불가 약관이 머릿속을 스쳤다. 게다가 첫날이지 않은가. 지금은 참아야 했다.
지속은 더 이상 분노 표출자가 아니었다. 분노는 손해만 끼치니 삼십 대의 삶은 달라져야 했다. 그렇게 기분이 팍 상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지속은 쭈구리로 한 달을 다녔다. 이젠 요령이 생겨 고장 난 헤드를 익숙하게 잡아 씻었고 젖은 머리 그대로 집으로 왔다. 지켜보니 젊은 신규는 다 지속처럼 다녔다. 지속의 구원자, 수영장 틴트 여신이 오기 전까진!
그날도 도살장에 끌려가듯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제 오 개월 남은 회원권을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사람이 자주 바뀌어 서먹한 초급반의 특성상 있을 수 없는 하이톤의 밝은 목소리로 한 여자가 모두에게 인사하며 들어섰다. 젊은 아가씨였는데 예뻤다. 실루엣도 훌륭했다. 지속은 초라한 자신의 가슴팍을 한번 내려다보곤 다시 여자의 얼굴을 봤다. 자연스러운 눈썹 문신과 꽃분홍 틴트를 바른 여자는 꾸안꾸의 정석을 보여줬다. 두상도 작아서 수영모의 굴욕도 없었다. 수영모를 쓰면 항상 눌린 찐빵이 됐던 지속은 그녀를 수영장 틴트 여신이라 생각했다.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지. 모두가 그녀에게 호감의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단! 할줌마 돌고래 무리만 빼고.
이제 자유형 레슨을 받아 지속은 배형으로 레일을 출발해 자유형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했다. 틴트 여신은 완전 초보는 아닌 듯 곧잘 배형과 자유형을 했고 수업은 재미있게 끝났다. 지속은 쭈굴쭈굴 아무도 찜하지 않는 고장 난 샤워기를 찾아갔고 여신을 지켜보니 겁도 없이 첫날의 지속처럼 오색 샤워볼이 걸린 샤워기에서 망설임 없이 씻는 것이 아닌가! 지속은 한 떨기 꽃잎 같은 틴트 여신이 자신처럼 마음을 상할까 우려하며 지켜보는데 역시나 가만히 둘 할줌마가 아니었다. 비키라는 손짓을 했는데 여신은 움직이지 않고 계속 씻었다. 뭐지. 화가 난 듯 할줌마는 언성을 높였고 여신은 차마 적을 수 없는 걸걸한 쌍욕을 박더니 키 작은 할줌마를 내려보며 눈을 부라렸다. 지속은 속으로 여신을 응원했다. 마치 이십 대의 패기 넘치던 자신을 보는 듯 지속은 비누 거품도 미처 씻지 못하고 싸움을 구경했다.
이에 돌고래 무리가 위기의 할줌마를 도우러 몰려왔다. 할줌마들은 여신을 둘러싸고 젊은 게 싸가지가 없네 너는 안 늙을 거 같냐. 너 이곳에 못 다니게 만들어준다 어짼다 아주 깡패들이 따로 없었다. 지켜보던 지속은 저 싸움에 끼어들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여신이 급하게 옷을 입고 나서길래 집으로 가나, 여신을 미처 돕지 못해 미안했다. 미안함을 뒤로하고 로비로 내려가니 그곳에 여신이 관리자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는 선뜻 나서지 못한 지속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해 다가가 말을 얹었다. 지속 또한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하며 보태어 돌고래 할줌마들이 머리카락을 말리는 드라이기로 다리를 벌리고 아랫도리도 말린다며 흉측스러운 꼴을 매일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게다가 수영센터에 텃세가 왜 있냐며 조치를 취해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건 센터 관리 소홀이니 환불을 해줘야 된다고 여신과 입을 모아 강하게 말하자 관리자는 알겠다고 답했다. 대답을 들은 지속은 집으로 돌아왔다. 온종일 궁금했다. 어떻게 됐을까?
다음날 두근대는 마음으로 센터에 들어섰다. 돌고래 떼들은 오호츠크해로 떠났을까? 그럴 리가. 삶은 드라마나 소설이 아니지 않은가. 그들은 여전히 수영장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지속은 수업 시간 내내 틴트 여신을 기다렸다. 여신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오지 않았다. 풀이 죽은 지속이 샤워실로 들어서는데 못 보던 큰 팻말이 보였다.
"샤워기 독점 금지"
지속의 동공이 커졌다. 가만 보니 샤워기를 찜해놓은 목욕바구니가 말끔히 사라졌다. 지속은 처음으로 구석자리가 아닌 중앙에서 세찬 물줄기 속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했다. 이 기쁨을 여신과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여신은 오지 않았다. 그녀 덕분에 지속은 중이염과 비염에 걸리기 전까지 센터를 잘 다니다 돌고래반 상급을 앞두고 수영을 관뒀다.
지속은 틴트 여신을 떠올리며 지난날 분노 표출자로 살았던 자신을 돌아봤다. 그녀도 지속처럼 분노했어도 마음이 여려 상처받았다고 그래서 수영장에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고. 지속만은 그렇게 틴트 여신의 편이 되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