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아무도 몰랐던 비밀 의식 편
수영은 다이어트에 효과가 없었다. 이른 새벽 운동을 하고 집에 온 지속은 입맛이 돌아 고봉밥을 한 그릇씩 먹고 잤다. 그렇게 먹고 자고를 반복하니 의도치 않게 벌크업되어 건강한 돼지가 되었다.
행복한 돼지로 살다 보니 운명처럼 결혼 후 6개월 만에 지속에게 아기가 찾아왔다. 아기의 태명은 괌돌이였다. 곰과 감의 중간 소리로 둘 다 지속이 좋아하는 것이었다. 병히와 지속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기다리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지속은 하늘에서 떨어진 크고 잘생긴 수박을 덥석 안았는데 기쁜 마음으로 쪼개 보니 붉은 과육이 몽땅 물이 돼버린 곯은 수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괌돌이 태몽 같은데 순간 불안한 감정이 스쳤다.
정기검진 날, 아기집에 태아가 없었다. 초음파 속 검고 텅 빈 아기집은 마치 뻥 뚫린 구멍처럼 보였다. 지속은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암흑으로 암흑으로. 그 캄캄한 곳 어디에도 괌돌이는 없었다. 그렇게 유산을 했다. 상심에 젖은 지속은 식음을 전폐하고 온몸의 수분을 말릴 기세로 울기만 했다. 무엇보다 세상에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한 괌돌이를 눈물로 새기려는 듯 울기만 한 지속이었다. 병히는 심장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고 세포를 잃은 것뿐이라는 매우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소릴 했지만 지속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속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은 덧없이 짧게 지나가버렸다.
깊은 슬픔과 상실감은 처음엔 지속의 두 팔을 야금야금 삼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더니 그다음엔 다리를, 마침내 머리와 심장까지 모조리 삼켜버렸다. 슬픔에 잠식당한 지속은 오랫동안 웃을 수가 없었다. 이 슬픔이 사라지긴 할까? 아니 희석되긴 하나? 지속은 다시 웃을 수 있을까?
웃게 되긴 했다. 일 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지속은 티브이 속 개그프로를 보며 깔깔거렸다. 배가 당기게 진심을 다해 웃어본 게 언제지? 시간을 거슬러 생각해보니 작년 이맘때를 마지막으로 웃지 못했다.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는 지속의 솟아 오른 배를 병히는 따사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지속은 임신 7개월의 임산부였다. 이번 태명은 건강하고 다부지게 태어나주길 바라며 짱짱이라고 지었다. 짱짱이의 태몽도 수박이었다. 하늘에서 작고 동그란 예쁜 수박이 뚝 떨어졌고 지속은 냉큼 안아 잡았다. 크기는 작은데 묵직한 무게가 느껴져 제대로 익은 수박이구나하며 크게 기뻐하며 꿈에서 깼다. 그리곤 혼자 멍하니 벽을 보다 눈물을 터트렸다. 기쁨의 눈물은 아니었다. 왜 하필 또 수박이었나. 두 번째 임신에 기쁘기만 한 지속에게 괌돌이가 자신을 잊지 말라고 그랬나. 그냥 눈물이 났다. 꿈 때문인지 지속은 짱짱이가 걱정되지 않았다. 이 아이는 분명 건강하게 태어나 품에 안아보고 냄새를 맡아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지속은 임신을 했다고 유난 떨지 않았다. 이게 먹고 싶네 저게 먹고 싶네 새벽에 병히를 뛰쳐나가게 만든 적이 없었다. 계절과 안 맞는 과일을 찾은 적도 한 여름에 잘 익은 동치미를 찾지도 않았다. 병히를 실컷 부리고 괴롭혀야 했는데 지속은 그 점은 아쉬웠다.
대신 홀로 그렇게 밤마다 울었다. 짧은 기간 동안 몸 안에서 죽음과 새 생명을 맞이한 지속은 지나간 죽음을 온 힘을 다해 슬퍼할 수도 다가올 새 생명을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혼재된 감정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종일 울적했고 무서운 소리지만 배 속에 아기만 없다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만삭의 지속은 새벽녘 잠든 병히를 뒤로 하고 거실에 나와 멍하니 창밖만 울면서 바라봤다. 호르몬의 농간으로 보기엔 상태가 심각했다. 뛰어내리고 싶어 창문을 열고 까마득한 난간 아래를 보다 태동을 느끼고 놀라 멈칫하곤 정신을 차렸다. 지속은 살고 싶었고 한편으론 죽고 싶었다.
지속이 이런 힘겨운 밤을 보낸다는 사실을 병히는 까맣게 몰랐다. 주변 사람 모두가 몰랐다. 평온한 표정을 연습해온 지속은 그 노력이 효과를 보인다고 생각했다.
일 년 만에 한바탕 웃고 난 지속은 가슴속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론 새벽녘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 들 때면 거실로 나와 선풍기를 최강으로 틀고 바람을 한참 맞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의식은 이틀에 한번, 일주일에 두 번, 한 달에 세번으로 줄다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잠에 들 수 있을 때쯤 짱짱이가 태어날 날이 코앞에 다가왔다.